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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r 27. 2017

나를 부를 때

잠시 동안 시를 읽었다. 서가에 멈춰 시집을 들고 있는 나를 누가 볼까 봐 오래 읽지 못했다. 왜 시 읽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시집을 내려놓으며 ‘집 근처 서점에서 사야겠다.’하고 생각했다. 주중에도 시집을 샀다. 몇 권 없는데, 이번 봄엔 두 번째다. 밤에는 책을 정리했다. 읽지 않은 책이 쌓여있고 그 뒤로 오래된 것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생각 없이 제일 위에 녀석을 들어 올렸다가 청소를 시작하고 말았다. 시계도 보지 않고 새벽까지 정리하니 60여 권의 책이 빠져나왔다. 3년 만에 털어낸 책장이 켁 하고 먼지를 토하듯 뱉어낸 책들을 보니 개운했다. 마침 동네에 중고서점이 생겨 정리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몇 권은 너무 오래돼서 판매할 수가 없다기에 다시 고민했다. 누굴 주기엔 낡았고 버리기엔 죄책감이 드는데.


팔 수 있는 책 중 몇 권을 챙겨 새로 생긴 서점에 가보니 벌써 책을 파는 줄이 길었다. 오픈 기념(?)으로 가장 상태가 좋은 책, 나름의 신간 위주로 챙겨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8,200원이 금세 지갑 안에 들어왔다. 당분간은 주말마다 책을 들고 와야 할 것 같은데 제발 직원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해주면 좋겠다. 나를 기억하는 건 시 읽는 모습을 들키는 것만큼 쑥스럽다.


책을 정리할 때마다 ‘모든 책 등이 나를 볼 수 있는 방이 있으면 좋겠다.’는 원대한 꿈을 꿔본다. 내가 책을 줄이는 게 방법일 것 같다. 달마다, 철마다 다른 건 잘도 버리는데 책은 버릴 줄을 모르니 이사 때마다 이삿짐센터 분들께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잘 버리는 습관 덕에 다른 짐은 거의 없다. 옷도 많지 않고.


지난봄에 찍은 사진을 보니 엄마의 얼굴에 주름이 더 깊어진 것 같다. 시간의 지문이 엄마 얼굴 위에서 선명해지고 있다. 내 얼굴에 뭍은 세월도 남들 눈에 그렇게 잘 보일까. 그래도 이왕 티를 낼 거라면 품위 있게 보여주고 싶다.

책을 팔고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와서 다시 서점으로 갔다. 몇 시간 전에 누군가 팔고 간 책 사이에 내 책도 진열되어있다. 나만 아는 표시를 확인하고 뿌듯하게 속으로 웃었다. 책 등 위의 이름을 다시 내려 본다.


무언가를 호명한다는 게 낯설게 들리는 순간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십 년 간 불리는 이름조차 남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잠시 빌려 쓰는 것처럼 나의 이름이 존재로부터 갈라져 틈이 생기는 것 같은. 엄마는 자주 나를 동생의 이름으로 부른다. 정말로 남의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다. 못되게도 그때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은 ‘만약 엄마가 정신이 흐려지는 때가 오면 엄마는 나를 나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몇 해 전에 누군가 이름으로 시를 지어주었다. 시를 잡고 몇 번씩 읽으면서 이름이 명상의 도구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나의 이름을 속으로 읽어본다. 보통의 여자애들 이름처럼 동글동글하지도 않고 소리 내어 읽을 때는 건조한 발음이 들린다. 귀엽고 세련된 이름이 부러워서 어릴 때는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름 불리는게 달갑지 않았던 7살, 새로운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던 날 원장 선생님은 내 이름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내 이름을 반복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마치 반성문을 소리 내어 읽는 것 같았다.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는구나 생각이 들만큼 선생님은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리고는 결국 받침이라곤 없는 내 이름에 내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동글동글한 받침을 붙여주었는데, 학원 가방에 그녀가 굵은 매직으로 써준 이름은 당황스러울 만큼 촌스러웠다.  


엄마, 여긴 아닌 것 같아!


라고 외치고 싶었다.


앞으로 큰 사고가 없다면 인생의 1/3쯤 산 것 같은데, 이제야 나의 이름이 싫지 않다. 그래도 시 읽는 모습을 들키는 것처럼 누군가 나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은 여전히 쑥스럽다. 남의 것을 빌려 쓰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속으로 쑥스러워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답한다.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과 더 친해지기 위해 나의 이름으로 지은 시를 꺼내 읽으며 불러보자. 나의 이름을.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 시집의 이름은 '눈 앞에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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