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Paul Jul 16. 2017

참외에서 뜨거운 맛이 나요.

제철 과일이 맛있다고 말하는 건 ‘월요일엔 더 출근하기 싫다.’는 말만큼 쓸데없다. 특히 요즘 참외는 로열 꿀참외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달고 아삭하다. (‘아삭하다’란 말은 참 재밌다. ‘달콤하다’라고 표현하는 음식을 먹을 때 달콤 달콤 소리가 나지 않지만 ‘아삭하다’라고 표현하는 음식을 씹을 땐 실제로 아삭아삭 소리가 난다. 이토록 투명하고 정직한 말이라니.) 처음엔 매일 퇴근 후 한 알씩 먹는 맛에 하루를 버텼는데 먹다 보니 하나로는 부족해서 요즘은 2알씩 먹는다. 3알은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가끔은 지키기 어렵다. 마트에 가면 주먹만 한 참외 7-8개를 9천 원 정도에 살 수 있는데 매일 한두 개씩 먹고 또 다른 가족들이 같이 먹다 보면 한 꾸러미를 사도 사나흘이면 사라진다. 내가 제일 많이 먹고, 또 퇴근 후 집에 참외가 없으면 초조하고 시무룩해지는 것 역시 나라서 퇴근길엔 꼭 참외가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마트에 들른다. 


올여름은 무더위가 전조 없이 절정에 이른 것 같다. 매년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을 나기 위한 보조식품(?)을 하나씩 점찍어두고 꾸준히 냉장고를 채워 놓는다. 올해 나에겐 참외가 있고 동생이에겐 아이스크림, 엄마에겐, 음. 엄마에겐 뭐가 있냐 하면... 그래 엄마에겐 참외와 아이스크림이 있다. 마트에 들러 참외를 살 때 동생이의 아이스크림을 같이 산다는 걸 고자질할 마음은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기 위해 이 긴 문단을 할애한 것처럼 되어버렸네. 역시 진실은 감춰지지 않는다. 


아무튼 가르친 적도 없는데 입이 고급이라 동생이는 하겐다즈 커피 맛, 배스킨라빈스 자모카 아몬드 훠지를 선호한다. 절대적으로 선호한다. 동생이의 주문을 받아 배스킨라빈스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갈 때는 매장에 들어서기 전 발음 연습을 한다. 자모카 아몬드 훠지, 자모카 아몬드 훠지. 자모카 아몬든 훠지, 아모카 자몬드 훠지. 미리 연습하지 않으면 우스운 꼴 당하기 십상이다. 그냥 ‘저거 주세요.’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아마추어 같으니까. 프로답게 산 아이스크림을 들고 현관문을 열면 동생이가 바로 숟가락을 꺼내 세팅한다. 아이스크림과 참외로 다과를 차린 후 허겁지겁. 아! 참외가 작년에도 이렇게 맛있었나? 내 입맛이 변했나? 접시에 예쁘게 잘라 놓으면 내 몫의 참외에 동생이가 자꾸 손을 대기 때문에 요즘은 그냥 귀찮은 척 껍질을 벗겨 통째로 들고 먹는다. 며칠 전 동생이가 


참외 그렇게 깎지 마. 


하고 일갈했다. 눈치 빠른 계집애. 그런데 얼마 전 성주군에서 참외를 수십 톤씩 땅에 묻는다는 기사를 봤다. 이렇게 맛 좋은 참외를 땅에 묻는다니. 그것도 참외의 메카 성주군에서. 이유인즉슨 지난해 10kg 한 박스에 1-2만 원 하던 참외 값이 올해 5-6000원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농민들의 손해를 막아보고자 미봉책으로 지자체에서 참외를 사들여 퇴비로 쓴다는 것이다. 어쩐지 이마트에도 동네 슈퍼에도 노란 참외가 수북수북하더라. 그래도 그렇지 참외를 퇴비로 쓴다니 난생처음 듣는 얘기다. 참외가 제대로 퇴비 역할을 할 수는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그게 과연 제대로 된 대책 인지도 의심스럽다. 참외를 사랑하는 수도권 거주자로서 꿀참외를 싸게 먹는 올여름이 좋기는 하지만 가뭄이라 농민들 시름이 깊은 때에 이런 소식은 마음에 아프다. 


하긴 내가 참외를 많이 사 먹기 시작한 것도 마트에서 참외가 많이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달 새 참외 값이 29%나 떨어졌다고 하니 내가 왜 참외를 자주 사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지난겨울 날씨가 따뜻해 참외 작황이 두 배 이상 늘었고 참외 값은 전년 대비 20% 넘게 떨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참외 맛에 완전히 빠져버렸는데 농가에서는 애써 키운 참외를 땅에 묻어야 하는 상황이니 어쩐다. 지난달 폴란드 여행 중 호텔 조식으로 맛본 멜론도 참외 맛을 이기지 못해서 열흘 내내 참외 생각을 했다. 물론 맛있는 게 많아서 자주 한 건 아니다. 


어제도 참외 두 꾸러미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참외를 사려는데 깜짝 놀랐다. 참외 옆에 멜론이 떡! 하니 놓여있는 것이다. 동네 마트에 멜론이, 게다가 국산! 지구온난화가 이렇게 심각했나 무서웠다. 주먹만 한 참외는 차라리 귀엽게 보일 만큼 커다란 멜론이 무서웠다. 최근 고흥군에서는 패션프루츠 재배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고흥군 농업기술센터에서는 고흥을 아열대과수의 메카로 육성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제주도에서는 커피 생산을 테스트 중이고 이미 남부 해안의 어종이 바뀐 지 오래다.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매일 신경 쓰고 산다는 건 어렵다. 정말로 “사람 잡는”무더위가 찾아오거나 따뜻한 겨울을 체감할 때, 그린란드에서 딸기를 재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무더위가 심각할 때 한마디 거들뿐이다. 겨우 하나 실천하는 건 수돗물 잘 끄기 정도다. 양치를 할 때 양치 컵을 쓰고, 손을 씻을 때 물을 적시고 비누질을 할 동안은 물을 꺼두고 다시 세척할 때 물을 트는 것. 고작 그 정도로 나는 지구 생각 꽤나 한다고 스스로 어줍지 않게 위안 삼는다. 지구가 뜨거워져서 나는 올여름 맛있는 참외를 싸게 먹는다. 마냥 달게 먹긴 어려운 맛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