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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un 05. 2016

사해에서 살아 돌아왔다!

입에 짠물이 왈칵 들어왔다. 우웩! 물 한 바가지에 소금 스무 바가지를 퍼부은 듯 한 짠맛이었다. 온몸 안팎으로 소금물에 팍팍 절여지는 몇 초간 화가 날 만큼 따가웠다. 화가 나는데 자존심 상하게 눈물이 솟아났다.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절대 가라앉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발을 땅에 디딜 수도 없었다. 물에 들어가기 전 나는 불안떨며 망설이고 있었다. 흥분한 외국인 친구들은 물속에 풍덩풍덩 뛰어들며 소심한 동양인 친구를 위해 한 마디씩 했다. 성의 없고 형식적인 말들을 나도 듣는둥 마는둥 다. 그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나의 진정한 친구가 말했다. 장애물 달리기 선수처럼 길고 탄탄한 팔다리를 가진 그녀는 평소 운동을 즐기는 덴마크인이었다.  


나 수영 못하는데.
둥둥. 걱정하지 마. 넌 절대 가라앉지 않아. 여기는 수영을 못해도 상관없는 곳이야.


190이 넘는 키에 다정함을 꾹꾹 눌러 담은 호주 아이도 거들었다.


둥둥. 심지어 여기에서는 물에 빠져 자살하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 절대 가라앉지 않거든.
그으래?(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말이로구나. 일부러 물에 빠지려고 애를 쓰려는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해주다니. 자살할 수 없다니 평화가 절로 느껴진다.)
저기 저 사람들 보라구. 물에서 책을 읽고 있잖아? 저 사람들이 다 수영을 잘 한다고 생각하니? 아니야,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뜨는 거라구. 너도 저렇게 책을 읽을 수 있어. 지금 당장!
그렇구나? 난 책을 읽고 싶은 건 아닌데. (누워있는 자세도 전혀 편해 보이질 않아. 저 사람들은 정말 책을 읽고 싶어서 읽고 있는 거니? 서양인들은 원래 똑바로 누워서 책 보는 게 편하니? 굳이 사해에 누워 책을 봐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햇볕도 이렇게 강해서 눈이 부실 텐데. 저 사람들도 그냥 우리 보라고 책 읽는 척하는 거 같아.)



아까부터 물장난에 신이 난 인정머리 없고 철없는 나머지 녀석들도 한 마디씩 보탰다.


거기! 어서 들어와! 둥둥! 뭐하는 거야. 그냥 들어와. 이렇게 재미있는데 뭘 망설이는 거야. 시간 없어! 두 시간 후면 가야 하는 거 알지?


좀 더 망설이는 동안 덴마크 친구도 물속에 합류했다.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준 것은 나의 절친한 스위스 친구 Maja였다. 155 정도 키에 작고 마른 Maja는 170이 넘는 튼튼한 한국 여자애를 천천히 안심시키며 최대한 수영 비슷한 걸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겨우 그녀의 손을 잡고 발을 조금씩 파닥 거리는데 성공했다. 뭔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책 읽는 사람들처럼 물 위에 누워보려고 천천히 몸을 뒤집는 순간, 역시나 균형을 잃었고 사정없이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공포스러웠던 건 수영 못하는 내가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입과 코로 무차별 침투해오는 소금물 때문이었다.


-웩! (짜다는 말 이상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지금 그럴 정신이 아니니까. 나중에 다시 설명해줄게! 웩!)


다정했던 호주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둥둥, 심지어 여기에서는 물에 빠져 자살하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 절대 가라앉지 않거든.’


(과연 네 말이 맞구나! 가라앉질 않아! 그래서 발도 땅에 디딜 수가 없다구!)어푸- 우웩! 어푸. 악!


엎치락 뒤치락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엄마 얼굴이 잠깐 왔다 갔다 한 것도 같고 내가 이렇게 위험에 빠졌는데 친구들은 죄다 어딜 간 건지, 이 녀석들! 나가서 보자!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던 그때 Maja의 작은 손이 나를 구원해주었다. 커다란 동양인 친구가 소금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스스로 동그랑땡이 되어 바닷물 위를 프라이팬 삼아 앞뒤로 몸을 뒤집어가며 소금물과 요르단 태양에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 더 보지 못하고 손을 뻗은 것이다. 그녀의 손을 잡고 나는 겨우 안정을 되찾아 인류가 최초로 직립보행을 시작했을 때의 기쁨을 맛보았다. 아! 두발이 땅을 디디고 있다!




벌떡 일어나 눈가를 씻어내고 귓바퀴를 손가락을 훑어 보니 소금이 싸악. 맙소사! 얼마나 염도가 높고 해가 강한지 순식간에 물기가 마르면서 소금이 생긴 것이다. Maja도 놀라 한 마디 했다.


염도가 70%라더니! 진짜였네.


이걸 모아서 집에 가져가서 ‘어머니, 제 몸으로 만든 소금입니다.’ 하 엄마가 좋아할까? 사해는 과연 죽을 사자를 쓰는 것이 맞는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역시 수영은 배워야 할 것 같다.



어제는 여름이 시작도 되기 전에 기력이 떨어져서 늦잠을 잤다. 오랜만에 다성 수면을 경험하며 자다 깨다를 몇 차례 반복하다 1시가 넘어서 버섯머리를 만났다. 오래전 강원도에서 맛 본 쫄깃쫄깃한 산닭을 떠올리며 '강원도 토종 삼계탕' 집으로 들어갔다. 찜질방 마냥 사물함에 신발을 넣고 줄을 서서 홀 아주머니가 이끄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과연 맛집이로군. 옻닭 삼계탕 두 마리를 시켜 살뜰히 발라먹었다. 삼계탕의 대추는 먹는 게 아니라지만 육즙 밴 단맛에 끌려 4알이나 쪽쪽 빨아먹었다.


최근 빵을 주식 삼아 지낸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고기를 더 먹어야 했는데. 닭 한 마리를 배불리 먹고 나서 기분도 좋겠다 삼계탕은 내가 살게. 하고 계산대 앞에 섰는데 맙소사. 한 그릇에 16,000원. 이건 예상에 없던 가격이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미안, 이번엔 각자 계산할까?'라고 말하는 건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친구가 올여름 건강히 나기를 바라며 계산을 마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최근 야간 수영반에 등록한 버섯머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여름휴가를 대비해 수영복이나 구경하기로 한 것이다.


올여름은 래쉬가드가 유행이래. 수영장에서도 래쉬가드를 입어. 실내수영장에서. 웃기지 않니? 그것도 밤 10시에 말이야. 하하하. 왜 입는 거야? 하하하.


아무래도 래쉬가드는 태닝을 할 것이냐 아니냐 가 아니라 유행을 따를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 같다. 버섯머리말대로 쇼핑몰엔 다양한 디자인의 래쉬가드가 가득 걸려있었다. 예쁜 건 비싸다는 진리는 올 여름에도 여전했다.



너도 수영을 배우는 게 어때? 크게 힘도 들지 않고. 건강도 챙길 겸.


난 안경을 안 쓰면 안 보이니까.
아, 그럼 도수 넣은 물안경을 맞추면?


그건 너무 비싸고.
그치, 넌 특수렌즈... 근데, 나도 물안경 쓰면 김이 서려서 거의 잘 안 보이는 채로 하는 거야.
답답하지 않아?
답답하긴 한데.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김이 서릴 물안경에 특수렌즈를 장착해서 비싸게 맞출 필요는 없겠고, 안 보여도 배우는 건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알려주는 동작을 볼 정도는 되어야겠는데. 나는 이미 십 년 전 사해에서 수영을 못해 죽을 맛을 본 적도 있고. 앞으로 언제 삶의 위기를 만날지 모르는데 수영을 안 배우는 건 더 위험한 것 같고. 막상 수영을 배우려면 수영복이랑 물안경이랑 사야 하고, 수강료도 들 텐데. 나는 요즘 빵 투어 하느라 돈을 참 많이 썼고. 아무래도 당분간 물을 조심하면 되겠지?


언젠가 수영을 배워야겠다. 언젠가. 그게 올여름은 아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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