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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r 26. 2016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글

얼마 전 작고하신 움베르토 에코는 말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겐 두 종류의 문학이 있다. 내 작품이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작품들, 그리고 내가 쓴 작품들.> 나는 전자에 커트 보니것, 돈 드릴로, 필립 로스, 그리고 폴 오스터를 넣는다.


비슷하게 말하자면 나에겐 두 가지의 책이 있다. 쓰고 싶어 지는 책과 쓸 수 없게 하는 책. 둘 다 좋은 책인 경우에 한한다. 

몇 주 전, 오랜만에 편집실에 찾았다. 입구까지 마중 나온 옛 팀장님을 따라 거대한 빌딩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예전의 허름함도 정겨움도 없는 세련되고 삭막한 모습이 낯설었다. (요즘 서정이 없는 것의 잔인함에 점점 기가 눌린다.) 그날 오전, 몇 년 만에 예전 방송 CD를 다시 보았다. 쪼그라들 대로 작아진 심장을 쥐고 울먹이며 쪽 대본 수준으로 탈고했던 첫 대본. 번지 점프대 위에 서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만든 입봉작이 어설프나마 우아한 백조처럼 덤덤히 모니터에 플레이되고 있었다. 그때 쓴 피 말리는 대본을 다시 보려면 고장 난 외장하드를 빨리 고쳐야겠다. 내 청춘의 기록이 그 작은 기계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편집실은 예전과 달리 창도 없고 장비는 세련되게 달라졌지만 모던타임스 속 찰리 채플린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지긋지긋해도 나무문에 창문 달린 옛 편집실엔 정이 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더욱 그렇다. 쉘리 님이 보여주는 오래전 취재기록을 다시 읽어보니 아련해진다 그땐 사람들이 있어서 좋았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사람 때문에 좋았다.‘우리’가 있었다. 혼자 있지 않았다. 편집실을 나오면서 주중에 다시 한 번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를 내려 편집실에 들고 가서 그림 얘기도 듣고 구성 얘기도 배우며 휴가도 없이 세심하게 가르쳐주시는 것들을 귀담아듣곤 했는데. 그런 시간이 고마웠으니까 지금 외로운 동지에게 한 번 더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입봉작의 내레이션을 곱씹어보고 편집실에 다녀온 밤 나는 다시 무언가가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한 글자 쓰기를 수백 번 지웠다 썼다하다 날이 새는 경험이 그리웠다. 다 쓰고도 다시 지우고 줄이고 또 줄이고 결국 스무 줄을 지우고 한 줄을 남기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사무친다. 

폴 오스터의 책이 동시에 두 권이나 나왔다. 한 권은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늦었고 한 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라 진정한 깜짝 선물이었다. 얼마 전 움베르토 에코의 작고 소식을 듣고 나는 좀 불안했다. 폴 오스터 옹(아직 옹이라고 부르긴 그렇다. 아니다. 그의 눈을 본다면 절대 언제라도 옹이라고 부를 수 없다.)이 부디 담배를 끊고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랄 뿐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유작을 펼쳐보고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들을 떠올려보니 인간의 지력이란 세월을 거스르고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지난 주말 책장을 대충 정리했는데 앤 타일러의 여러 책들을 보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편들고 싶지 않은 주인공 캐릭터를 만난 것이 바로 앤 타일러의 <종이시계>였다. 여자도 남자도 확실히 내 주변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점점 그들의 감정선에 함께 동요했고 그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건 연애를 하는 것과 같고 소설이 필요한 순간은 모두 연애소설이 필요한 순간과 동치 시킬 수 있다는 말에 동감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불편하고 동의할 수 없던 주인공들은 내가 아니었을까. 내가 부리는 까탈과 맥락 없는 행동들을 모아놓은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역시 사람은 내 모습을 바로보기 불편해하는 것이 맞다.  

최근 무언가를 무척이나 쓰고 싶은데 막상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불안스럽게 흔들리기만 한다. 오늘은 아무런 뜻이 없는 글이라도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정말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 한편으로는 요즘 아무렇지 않게 쉽게 쓰는 것들에도 질려버렸다. 그런 것들만 쓰다가 그런 사람이 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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