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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r 26. 2017

그 얼굴을 먼저 보려고

에이취-


봄이 오는 소리다. 아침에 가만히 침대 앞에 앉으니 방에 먼지가 날기 시작했다. 며칠간 먼지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아직 겨울 외투를 정리하지 않고 걸어두었다. 겨울 외투 위에도 봄의 먼지가 달라붙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기엔 머쓱해졌지만, 한파가 불쑥 심통을 부리는 날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외출할 때엔 얇은 코트 안 겹겹이 껴입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지난주 만개했던 매화꽃은 이미 다 졌을 것이다. 혹여 아직 가지 끝에 달려있다면 오늘 내리는 비에 모두 젖은 땅으로 낙하하고 말 것이. 벚꽃이 봄의 상징이 된 것을 질투하는 하얗고 노란 꽃들이 남쪽에서는 피고 지는 일생을 한 차례 마무리했다.


- 오늘이 매화의 마지막 날이야.


친구가 5시에 방문을 두드다. 서울 가기 전에 매화축제는 보고 가야지 하고 시어머니 외투와 바지, 목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꺼내 주었다. 누가 봐도 동사람스러운 차림에 꽃무늬 스카프까지 둘러매고 집을 나섰다. 뻥 뚫린 고속도로 달리는 맛에 신이 나서 길 옆의 평범한 초록 풍경도 심상하지 않게 보였다. 한 시간쯤 바람 맛을 보고 나니 느릿느릿 경운기가 탈탈탈 여유 부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홍쌍리 여사님이(사람 이름이었다니. 게다가 여자 이름이라니.) 심은 매화나무가 매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는 매화마을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슬슬 걷기 시작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더니 매화는 꽃잎을 활짝 펼치고 아침 하품하는 어린애처럼 귀여운 향을 냈다.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니 정자에 대포 카메 든 아저씨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사람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우리도 가보자. 아직 부은 얼굴이지만 매화 풍경을 두고 사진을 몇 장 찍는데 저기! 하는 탄성이 들린다. 금빛 해가 천천히 빠르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너무 멀어 압도적인 크기의 일출은 아니었지만 예기치 못한 장면이라 반가웠다.


야, 여기 서봐. 손 내려 봐. 오른쪽으로. 아니 당겨. 좀 더 아래로. 아니 왼쪽. 쭈욱 내려. 더더더더.


해를 꼬집는 모양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친구를 한참 세워두었더니 옆에서 구경하던 아줌마가 한 마디 했다.


아니, 카메라가 움직이면 되지!


‘소란스러웠다면 죄송해요.’ 하고 생각하는 순간 찰칵. 마침내 사진을 찍었다. 아주머니는 쓱 사진을 보더니 친구를 불렀다.


야야, 여기 서봐라.


향기로운 아침 공기를 마셔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정자 아래로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매화꽃이 솜을 뜯어놓은 것처럼 강줄기를 군데군데 가리고 있다. 기와집 지붕 위에도 아침 햇살이 손을 뻗고 있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산 공기와 햇살이 몸에 들어와 먼지를 그러모아 코로 나오는 듯했다. 내 코 앞으로만 회색 먼지 구름이 모였다 사라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시 언덕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하얀 꽃들 사 드물게 홍매화가 한그루 씩 섞여다. 저 멀리 매화나무 사이로 알록달록한 등산복이 무리 지어 있다. 일출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얀 그림 사이에서 또 다른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부지런히 한철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은 불을 지피고 솥을 달구어 놓았다. 벚굴과 칼국수를 판다고 걸어놓은 입간판은 한 사람이 쓴 것 마냥 비슷해 보였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카메라만 들고 혼자 온 사람들 사이에 우리도 있었다. 몇 년만에 나란히 서서 사진도 찍었다.


우리 옛날엔 같이 놀러 다니는 거 많이 했는데.
오길 잘 했지?
응. 좋다.
애들 빨리 키우고 우리끼리 이렇게 맨날 놀러 다니자.


꽃나무 사이에서 폴짝 거리 향기로운 숨을 쉬니 올해는 정말 봄인가 싶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하던 것이 벌써 10년이 되었다.


10년 만이네요.
그러네. 이런 날이 너무 오래 걸렸다.


지난주, 마지막 엄혹한 시절을 보내는 오랜 벗과 지난 시간을 소회 하니 오지 않을 시간인 듯했던 날이 코앞이라 다행인 듯 허무했다. 봄은 이제 시작이다. 만개한 매화가 봄의 시작을 위해 터지는 축포처럼 꽃잎을 열었다가 땅에 떨어지는 3월. 기다리지 못하고 남쪽으로 마중 나가 봄의 얼굴을 보니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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