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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ul 10. 2017

너의 자국을 찾아봐.

여보세요?
동생이니?
아뇨, 둥둥인데요?


여보세요?
둥둥이 엄마- 나야.
엄마 바꿔 드릴 께요.


여보세요?
응, 둥둥 아.
저 동생이에요. 언니 없어요.


어릴 때 집 전화를 받으면 우리 세 모녀 목소리가 어찌나 비슷한 지 엄마 친구, 내 친구, 동생이의 친구들  할 것 없이 번지수를 잘못짚는 일이 수두룩했다. 지금은 각자 음성에 나이테가 새겨져 조금씩 달리 들린다. 목소리엔 묘한 것이 있어 귀를 기울이면 사람의 내밀한 곳으로 연결된 통로를 지나는  같다. 어떤 목소리는 혼자 조용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가게 하고 어떤 목소리는 차가 꽉 찬 대도시 한가운데를 억지로 지나게 한다. 하루 동안 듣는 모든 소리 중 목소리는 얼마나 많을까?


남들보다 소리에 더 민감한 편이라 얼굴보다 목소리 기억이 쉽다. 음성에서 그 사람의 체형을 대략 짐작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 틀린다. (쳇.) 그냥 개인적인 재밋거리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짐작해본다는 건 재미있으니까. 음성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버릇에도 집중하게 된다. ‘그는 좋은 사람이야.’, ‘그 사람 나랑은 별로야.’라고 할 때 말투에 근거를 두는 경우가 꽤 많다. 상냥하거나 투박한 말투, 꾸민 듯 한 말투, 억양, 자주 쓰는 어미, 단어, 군더더기. 모든 것을 유심히 듣는다. 마흔이 되면 인상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나는 인상만큼 확실한 표가 말투라고 믿는다.


말은 듣기보다 하기 쉬운 이유로 주변에서 good listener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나도 good listner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말이 입술까지 몰려나와도 의식적으로 오물오물하다 참아버리는 경우가 있다. 말은 줄여서 후회할 일이 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말이 많다. 가끔은 많은 말을 하려고 종종거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쑥스러워진다. 또 가끔은 하고 싶은 말 참느라 뭐 마려운 개 마냥 끙끙거리는 나를 보며, ‘뭘 참냐! 그냥 시원하게 해버리고 말지.’라고 합리화한다. 어떤 지혜로운 친구는 good listener를 deep thinker라고 다. 내 입이 말하기 바쁘면 내 머리는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년 쯤 되면 올해보단 좀 더 고운 말투를 가진 good listener가 되어 있을 거라고 대충 믿어봐야지.


예민하기 그지없던 사춘기 시절에 라디오 키드가 된 것은 목소리에 쉽게 끌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라디오를 내내 켜두곤 했는데, 엄마 몰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으면 의리 없는 동생이 녀석이 고자질을 한다.


엄마, 언니 라디오 듣는데!
(이런!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구나.)......


엄마는 지체 없이 달려와 소중한 워크맨을 탁! 채간다. 너 이놈 동생이. 언젠가 이 분을 다 갚아 줄 테니 기다려라. 잊지 않고 좌시하지 않겠다. 그러나 당장은 내일 밤 8시가 되기 전에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니 복수는 잠시 미룬다. 엄마에게 워크맨을 빼앗긴다고 라디오를 포기할 순 없다. 재빠르게 수소문해 친구의 워크맨을 빌려 다음 날 8시 어김없이 DJ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만다. 목소리에 현혹돼서 정들어 버린 DJ들의 얼굴에 주관적 잘생김을 입혀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소리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


나는 라디오 붐이 한 풀 꺾인 2000년 대에도 여전히 목소리 미디어를 사랑했다. 한 번은 애청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연결이 된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사연 당첨자에게 DJ가 전화로 직접 노래를 불러주는 데 당 된 것이다. 녹음방송이라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는데 오랜만에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조용한 지하 1층 출연자 대기실을 미리 탐색해 두고 휴대전화를 꼭 쥔 채 약속된 시간을 기다렸다. 부르르르~부르르르~ 작가는 꼭 신호음이 3번 가기 전에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두 번째 진동이 다 울리기 전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 아주 높은 목소리로 연습한 말을 했다.


오빠들! 메리 크리스마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참 명랑하시네요. 네, 있다가 그렇게 인사해주시면 돼요.


젠장. 용기 내서 딱 한 번이다 싶어서 던진 말인데 작가가 받을 줄이야. 나중에 녹음된 방송을 사무실에서 다 함께 들었다. 비록 크리스마스이브 밤 10시 야근 신세였지만 방정맞은 내 목소리 덕분에 다 같이 까르르 웃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날 작가가 내 이름을 큐시트에 잘못 적어주었다는 것. 작가 언니. 저는 유미가 아니에요.


목소리 얘기가 너무 멀리 왔다. 아무튼 나는 목소리와 말투를 탐색하기 좋아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목소리 사이의 틈을 벌려 의미를 읽고 싶은 것이다. 때로는 과도한 해석으로 잠 못 이루고 때로는 적절한 눈치로 칭찬받는다. 결국 소리에 별 관심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내가 그렇지 뭐.


다만 개인적으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가까이 지내는 이들에게 내 마음이 얼마나 열려있는지 알아채는 순간이 있는데, 어느새 그와 비슷한 말투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다. 순서가 거꾸로 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서로의 말투가 닮아있다면 우리는 서로 친밀한 사이임이 분명하다. 말이 닮은 후에는 사고가 닮아간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닮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닮아가고, 그래서 서로 말이 잘 통한다고 믿게 되고 더 좋은 사이가 되어 간다. 요즘 내 말에는 친밀한 사람들의 지문이 묻어난다. 그게 누구인지 당신도 알아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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