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Paul May 02. 2017

번지!점프를 하는.

이건 마치 억지로 자살하는 기분이야.


52m 상공에서 줄 하나를 믿고 낙하! 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인간 존재가 어둠 속에 숨어버리고 나는 인류 최초이자 유일의 추락하는 human being이 되었다. 잠시나마 아담과 어깨를 견주는 뿌듯함에 빠져드는 나를 읍! 소리가 먹히는 공포가 깨웠다. 발 아래 검은 강물 속으로 풍덩 빠지면 다시 솟아오르지 못할 것 같은 과장된 두려움이 온 정신을 압도했다. 구경꾼들 눈에는 불과 몇 초간의 평범한 수직 운동이지만 그 줄에 매달린 사람이 나라면 찰나는 영원만큼 길어진다. 12월의 강원도 바람이 나의 낙하운동에 얄미운 추임새를 불어넣었다. 슈욱- 슈욱-


야 이놈의 바람아. 얌전히 있지 못하겠냐. 줄 끊어지면 네가 잡아줄 거냐!


내 영혼의 소리없는 아우성에도  철원시의 매서운 바람은 자비 없이 뺨을 후려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순서대로 뛸 걸! 번지대 앞에서 무섭다고 발을 구르며 울상이 된 친구들을 답답하게 바라보던 나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서


내가 먼저 뛸게!


하고 헛소리를 지껄여 버렸다. 허세를 부렸으면 멋있게 다이빙 포즈라도 취하면서 뛸 일이지


저기요. 저 안 뛰면 안 돼요? 엉엉.


방금 만난 번지대 직원을 피붙이처럼 의지하며 그의 손에 생사여탈권이 있는 것 마냥 사정하는 모습은 뭐람. 그렇게 무서우면 ‘안 뛰면 안 돼요?’ 가 아니라 ‘저는 안 뛰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될 것을


안 뛰셔도 돼요. 그런데 환불은 안 돼요.


라는 말에 냅다 뛰어내리는 건 또 뭐람. 뛰자니 겁이 나서 울고 싶고 포기하자니 3만 원이 아까 눈물이 나고. 둘러보니 번지 준비하다가 몸무게 들통날까 봐 등 돌린 친구, 번지 대에서 한 번 물러나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친구, 무서워서 이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은 친구. 누구 하나 변변한 도움을 줄 상황이 아니었다.


안 뛴다고 누가 손가락질하지도 않을 텐데, 돈 내고 무서운 영화 보는 것도 싫어하는 내가 어쩌자고 여기에. 뛰어내리다 심장이 멎으면 어떡하나. 혹시 줄이 헐거운 거 아냐? 직원들이 발견 못한 결함이 있으면 어떡하지. 엄마한테 번지 뛴다고 말도 안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공포를 지지하는 생각들이 우루루 몰려나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뛰기도 전에 겁에 질려 죽을 거야. 이럴 땐 빨리 뛰는 게 상책이다! 에잇! 참고로 '무저갱,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다.' 관용구의 의미를 체험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번지점프대 위다. ‘꺄악’ 소리를 지를 겨를도 없이 ‘나는 괜찮다. 줄이 나를 잡아줄 거야! 제발!’ 간절주문과 함께 몇 초간의 낙하. 허리에 달린 줄이 팽팽하게 펴지자 마자 반동이 나를 위로 잡아끌었다. 극한의 공포가 짜릿한 쾌감으로 반전되는 순식간이었다.   


끼얏호!!!


줄이 통통 튕길 때마다 신이 나서 고함을 질렀다. ‘혹시 지금 하늘을 날고 있는 건가?’ 신나는 기분을 즐기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번지대 위에서는 나를 서둘러 배 위에 조준하여 내려주었다. 꺅꺅 소리치며 좋아했지만 육지에 발을 딛자마자 양다리가 내 뜻과 상관없이 후들거리며 중심을 잡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확실히 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 4족 보행 짐승처럼 어기적거리며 배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을 꺼냈다.


엄마!! 나 번지 뛰었어!


이런 “도전”은 자랑으로 의미가 완성다. 자랑이 없다면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지.

 

뭐라고? 어휴!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걸 다했어. 우리 집안에 너 같은 애가 다 있니.


그렇다! 엄마는 나의 위대한 도전에 “우리 집안 최초”라는 왕관을 씌워주었다.


(이 번지란 것이 말이죠. 쉬운 게 아니거든요. 앞으로도 우리 가문에서 번지를 뛰는 사람이 또 나오긴 좀 어렵겠죠?) 하하하. 뭐 이런 게 별 거라고.


다리는 휘청거렸지만 입가에는 번지를 뛴 자의 여유가 만연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번지대 앞에서 울며불며 사정하는 친구들이 손가락 마디만큼 작게 보인다. 멀리서 보니 그런 코미디가 없다. 나도 몇 분전엔 저 앞에 있었는데 벌써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동안 셀프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그때의 나를 꺼내보았다. 머릿속에서 나를 다시 번지대 위 데려갔다. 취준생 시절엔 자주 번지대로 나를 소환했다. ‘이런 두려움 따위 조금만 지나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도닥였다. 실제로 꽤나 효과적이었다.


벌써 십 년도 더 된 기억인데 이토록 생생하다. 그날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주먹을 꼭 쥘 때 손등을 쓸고 가던 바람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살다 보니 번지점프와 비교도 안되게 무서운 일들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인생엔 계절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 계절이 그러하듯 인생의 계절도 순차적으로 찾아왔다.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겨울 뒤엔 반드시 봄이 오고 살랑대는 안정감을 만끽하다 보면 나의 재능을 꽃피울 여름이 잠시라도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계절이 반복되었다.


세상의 존재가 모두 지워지고 나만 점으로 남은 듯한 기분도 번지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과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을 때에도 그런 기분은 쉽게 찾아다. 번지대에서 발을 떼는 것처럼 결국 내가 결정하고 밀고 나가야 하는 일들이 산재해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움받을 용기'란 책이 유행했다.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책인데 요즘 나는  반대로 “상처 줄 용기”에 대해 생각한다.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상처는 더 많겠지. 가끔은 내가 받는 상 무감하게, 내가 주는 상덤덤하게 무시할 필요가 있다. 불과 몇 분의 시차를 두고 압도적인 공포가 화끈한 성취감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인생의 어떤 무게와 고통은 짜릿한 행복과 자랑이 될 수 있을까? 저 멀리 번지대 위에 나를 올려놓고, 또 저 아래 구경꾼 사이에 나를 섞어놓는다. 이제는 번지점프의 공포를 이겨 순간보다 구경꾼 속의 나를 상상하는 것이 더 위안이 된다.


멀리에서 본다. 나를. 남인 것처럼 본다. 그럼 어떤 일들은 작게도 보이고 가벼워도 진다. 우스워도 진다. 그렇게 또 이겨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얼굴을 먼저 보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