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의 사랑하는 두 번째 노트북이다. 울트라 슬림 노트북 1세대 모델로써 2012년 가을, 무려 백화점에서 샀다. 6개월간 할부로 갚아낸 160만 원은(비록 호갱님이었다 할지라도) 이후 오늘까지 느끼는 충만한 기쁨과 행복에 비할 바가 아니다. (라고 둘러대 본다.)
나의 첫 번째 노트북은 침대 아래 잠들어있다. 전원 버튼을 수차례 눌러도 응답 없는 노트북. 4년 간 밤낮없이 수고하고 노쇠한 몸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날, 윈도우 화면까지 보여주지도 못하고 중간에 툭, 꺼지고 말았다. 그것은 무려 ATM기에서 뽑은 현금 120만 원을 들고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산 노트북이었다. 하나의 물건에 그렇게 큰 돈을 쓰는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당황하고 있었던 걸까?매장 직원을 엿 먹일 생각이 아니었는데 왜 현금으로 뽑아서 30분 넘게 세고 또 세며 값을 지불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숫자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늘. 혼자도 아니고 친구랑 나란히 만 원짜리 총 240장을 세어 줬으니 직원도 황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친절히 사은품까지 챙겨줬던 거 잊지 않고 있다.
그렇게 산 1번 노트북은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우고 수많은 원고를 써냈다. 애지중지하느라 보안 창도 입혀주고 키스킨도 깔아주었다. 가끔 수리하러 가면 눈썰미 있는 이들은 “노트북으로 먹고사는 직업이신가 봐요.”라고 말했다. 키보드가 많이 닳아있고 노트북 속이 많이 상했던 거 같다. 딱 4년 만에 1번 노트북은 영면에 들었다. 잠시 생각 해보니 내가 그간 너를 참으로 자주 바닥에 떨구었더라. 키스킨이 다 무슨 소용이람. 범퍼 케이스를 씌웠어야 했는걸. 2KG나 되는 너를 개의치 않고 휴대할 만큼 참 애정이 깊었는데. 이제 가는구나. 안녕 1번.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2번 노트북은 휴대가 훨씬 편했다. 배터리도 오래가서 카페에 앉아있기에 부담 없었고 무엇보다 스타일이 좋았다. 물론 요즘은 더 날씬하고 예쁜 노트북이 많아져서 그에 비하면 그냥 평범한 검정 노트북이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멋과 선이 살아있는 보물이다.
2번 노트북으로 갈아탄 지 5년째인데 아직 1번 노트북을 버리지 못했다. 버리려고만 하면 키우던 강아지를 버리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물건에는 영혼이 없어.’ 말해 봐도 소용없었다. 몇 번 시도 끝에 결국 '다음에.'라며 침대 아래 쑥 밀어 넣었다. 언젠가는 버려야 할 텐데. 저 서아프리카 가나의 아그보그블로쉬 전자쓰레기 마을에서 어린 소년이 구리선을 뽑아내기 위해 나의 1번 노트북을 태우는 장면을 상상한다. 검은 연기, 붉은 노을, 구리선들. 그때 타고 남은 1번노트북이 구슬프게 이런 말을 읊조릴 수도 있다.
우리 잘 지냈잖아... 둥둥 아. 메모리들 아직 안 지웠다. 조심해라. 개인정보도 안 지웠다.
맙소사. 찬물 세수를 한 것처럼 정신이 든다. 가나의 중고 상점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옮겨 다니며 도용되는 내 소중한 개인정보! 안 된다. 그러니까 1번 노트북을 버릴 수가 없다. 아무래도 그에겐 영혼이 있는 것 같다. 1번 노트북에겐 침대 아래 쉼을 좀 더 허락해 주자. 우리 둘 사이 암묵적인 협상이다.
오늘도 2번 노트북과 외출했다. 일주일에 4-5일은 함께한다. 4년이 지났건만 1번 노트북에 비하면 아직 건재하다. 잔고장도 거의 없다. 1번 노트북은 A/S를 자주 받았다. (둘 다 삼성 노트북인데, 1번과 2번 사이에 기술이 많이 좋아졌나 보다.) 요즘 터치패드가 멋대로 굴긴 하지만 괜찮다. 언젠가 2번 노트북이 명을 다하면 또 못 버리게 될까? 엄마에게 물건 쌓아놓지 마!라고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는 내가? 만약 2번 노트북마저 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앞으로 엄마에게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가 없는데. 안되는데. 보통 노트북 수명이 4년이라는데, 우리 2번 노트북. 장수하려나보다. 버리느냐 마느냐, 아니 버릴 수 있느냐 아니냐를 선택하고 싶지 않으니 부디 장수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