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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Nov 25. 2015

그 벨을 울리지 마오

전화 앞에 포박당한 우리

작가는 손으로 먹고 산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다만 손이 키보드보다 전화기에 가까울 뿐이다. 처음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시작하면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 수시로 통화하면서 요즘 그 집 밥상에 무슨 반찬이 올라오고,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 쯤 잠드는지, 일주일에 몇 번이나 시장에 가고 요즘 집안에는 어떤 일이 있는 지, 자주 만나는 친구들은 누구고 주로 어디에서 모여 무슨 얘길 하는 지. 모르는 게 없게 된다. 부끄럽게도 약 먹는 시간 ,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 한 번은 "오늘은 화장실 잘 다녀오셨어요?"라고 남의 변비 걱정으로 통화를 시작한 적도 있다. 


전화로만 만난 사인데 이런 절친이 없다. 통화가 늘수록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처음의 수줍음이란 민망한 내숭이였던 것처럼 보인다. 능글맞게 닳고 닳은 체 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직접 얼굴을 보게되면 또 세상없이 수줍고 어색하게 “안녕하세요..”하고 갈 곳 잃은 눈동자로 바닥을 훑는다. 막상 전화기를 들면 직업인으로 충실하게 취재하지만 통화가 좋은 건 절대 아니었다. 한 달 남은 수능시험 기다리는 고3처럼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건 인터넷 댓글로 세상을 엎어 쳤다 매쳤다 하려는 키보드 워리어랑 다를 게 없다. 내가 바로 전화 워리어였다.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를 선호하는 스타일인데, 내가 어쩌다 이렇고 있을까. 하면서 또 수화기를 든다. 섭외는 안 되는 게 없어야 한다. 막내 시절 섭외전화에 실패해서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너 지금 저 능력 없어요. 라고 말하는 거니?” 라는 말이 돌아왔다. 협업이 아니라 각개전투였다. 남들은 다 총칼 들고 싸우는 전장에서 나는 새총 하나 들고 서 있는데. 도망갈 곳이 없었다. 냉혹한 세계다. 


냉혹한 세계에서 냉혹하게 배웠다. 

그리고 어느날 깨달았다. 세상에! 나도 설득왕이 될 수 있다는 원치 않는 자신감이 생겼다. 간절함 하나면 된다. 코너에 몰리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간절한 사람이 된다. 전화기 너머로 뻗어간 손은 벌써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무릎은 땅에 붙어버렸다. 될 때까지 권한다. 사정한다. 안 되는 건 없다. 안 되는 걸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는 일 년에 한 번 쯤 이면 충분하다. 간절한 입장이 되는 건 고통스럽다. 심장이 번개탄 위의 쥐포처럼 쪼그라들고 혈관은 커피색이 된다. 일주일씩은 밥 대신 커피와 초콜릿을 수혈 받으며 쏟아지는 잠이 버거워 책상 앞에 불편한 자세로 고개를 쳐 박는 시간이 켜켜이 쌓였었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것 같다. 워낙 소인배여서 나는 더 힘들게 버텼다. 


전화는 지치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주로 받는 전화가 괴롭다. 더 나쁜 건 나쁜 말을 전화로 하는 경우다. (하긴, 좋은 말을 전화로 들은 기억은 별로 없다. 사실 기억엔 하나도 없다. 그래도 있었겠지 뭐.) 나쁜 말을 전화로 듣거나, 억울한 말을 전화로 들으면 오랫동안 상세히 기억한다. 원래 억울한 일은 뼈에 새기는 거 아닌가. 



새벽 2시에 지금 당장 프랑스어 영상 번역할 사람을 섭외하라는 전화를 받은 날 나는 전국의 수많은 불어 능력자 중 내가 아는 약 30명을 대신해 총알받이가 되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전화를 하는 척 아침이 올 때까지 선배의 다그침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새벽 사이에 말총에 맞아 시체로 발견될 줄 알았지만 용케 살아 아침 댓바람부터 내가 살려낸 약 30명의 불어 능력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전화는 징글징글하다. 퇴근 후에, 주말에 울리는 전화는 귀신 목소리보다 무시무시하다. 꼭 중국 공포영화에 나오는 용과 돼지와 사자를 손에 잡히는대로 섞어놓은 것처럼 생긴 PD의 전화는 더 위협적이었다. 

- 사생활이 어디 있니 방송쟁이한테. 방송쟁이가 전화 안 받는 건 직무유기야 너! 

그런 말도 지겨웠다. 정말 인권 OTL이다. 나를 징글징글하게 괴롭히더니 말도 참 맘에 안 들게 한다. 지난 주 당신이(네가!) 당구장에서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하면서 대놓고 놀 때 나는 삼일동안 밤을 지새우고 이제 막 집에 기어들어왔단 말이다! 

- 아! 네,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네가 빈둥거리느라 아이템 구상도 안해서 나는 지금 샤워도 못하고 다시 구성안 쓰고 있지 않냐! 

구성안은 두 시간 내로 보내 드릴게요. 
- 내가 생각 못 한 인터뷰 세 개 이상은 써서 보내. 그 정도 작가가 해야하잖아? 

벌써 그 이상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게 찍어오는 지 두고 보자. 그 실력 내가 다 아는데. 누명쓰고 죽은 장화홍련이 된 것처럼 억울하고 분통해서 눈물이 찔끔 나는데 더 억울한 건 결국 나의 작가적 자질을 검증하려고 드는 그 세 개의 인터뷰를 짜내려고 나는 다시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는 거다. 내가 가끔 하는 저항은 겨우 편집실에 들어가서 소파에 전화를 내던져놓는 것 뿐 이었다. 혹시 눈에 잘 보일까봐 일부러 소파 홈 사이에 파 묻어놓고는 ‘조용히 혼자 울려라. 절대 내 귀에 들리지 마라.’라고 백일기도 하는 간절함으로 빌었다. 



그만 울려도 좋다.

지금은 좀 더 ‘인간적인’ 근로환경에서 일하고 있어서 근무시간 외 전화를 좀 안 받아도 불같이 화내는 사람은 없다. 좋은 어플도 생겨서 전화가 울리면 누군지도 다 알려준다. 스팸도 바로 차단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하다. 주말에, 퇴근 후에, 휴가 중에 뜨는 회사 번호만큼 기분을 망치는 것도 없다. 이직할 때 나는 기대했다. 아! 전화에서 해방이다. 착각이었다. 오히려 연중  며칠씩은 몇시간동안 번호가 붙은 전화앞에 딱 붙어 앉아 수십통의 전화를 연달아 받아야 하는 일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나같은 전화포비아 환자를 지속적으로 전화 앞에 세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까? 그래도 이제 직장생활 9년 차에 조금 숨통 트이는 건 받기 싫은 전화가 줄었다는 거.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오르는데, 나는 받고 싶은 전화가 있었나? 기다리는 전화 같은 거. 아니다. 없다. 역시 나는 전화가 싫다. 글이 좋다.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게 좋다. 세상엔 받아도 불편하지 않은 전화와 불편한 전화가 있을 뿐이다. 오래 전 우편함에서 기분 좋은 편지가 사라지고 돈 내놓으라는 고지서와 기분 나쁘지 않은 여러 우편물만이 남은 것처럼. 

*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인권보호 차원에서 이 글에는 한가지의 거짓말이 숨어있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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