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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y 22. 2018

건투를 빌어주세요

매일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지각인가! 휴, 아니구나.


출근이 한 시간 늦어져 해가 밝을 때 일어나게 된 탓이다. 불안 때문에 알람보다도 훨씬 일찍 잠이 깨서 회사 앞에 30분씩 일찍 도착한다. 익숙해지면 더 잘 수 있겠지. 9시 통근열차에는 앉을자리가 없다. 꼬박 1시간 40분을 서 있다가 종로에 도착하면 벌써 하루의 반을 쓴 기분이다. 덕분에 최근 카페인 효과를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업무 시작 전 커피 한잔을 쭈욱 들이면 전철에서 흩어졌던 정신머리가 모아진다. 커 힘만으론 부족하지만 긴장하고(혹은 긴장을 풀고) 일을 시작하는데 꽤 도움이 된다. 곧 익숙해지겠지.  


퇴근 후에는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선비가 채비하는 심정으로 당 덩어리를 하나 섭취한다. 마카롱이나 쿠키 슈나 에끌레어, 마들렌 등. 장거리 퇴근을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왔는데 하루 총 에너지 섭취량 중 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출퇴근 당을 줄일 수는 없다. 시계를 두 번 넘어 오가는 직장생활은 당 없이 불가능하다. 한 시간 늦어진 퇴근시간, 길어진 통근시간으로 집에서 먹는 저녁은 불가능해졌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을 준비하기도 여의치 않다. 곧 익숙해지겠지.



주말 출근 후 사무실에 들어선 월요일.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마들렌 3개를 주워 담았다. 커피와 레몬 마들렌으로 오늘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주말 출근 후”라는 말머리로 충분하다. 옆자리 동료에게도 하나 내밀었다.


이 보시게, 우리 오늘을 버티려면 이 정도 무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투식량이니 받으시오.


이런 긴말을 표정에 싣고 씨익 웃었다. 월요일이었지만 금요일 같은 몸. 아침 마들렌만 먹은 것도 아니었다. 점심 먹은 후엔 쿠키슈를 먹었다. (종로 아티제에는 쿠키슈를 팔지 않는다. 곧 망하려고 작정했나 보다. 대신 브리오슈 도레의 슈를 먹었다.) 그러나 주말 출근의 여파는 강력했다. 당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후 3시 40분. 직원 셋이 조용히 사무실을 나선다. 종로에는 분식집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들으며 일부러 먼 길로 돌아서 도착한 분식집. 종로 직장인들의 은신처인 듯했다. 떡볶이는 국가에서 금지한 유해식품 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주인아주머니의 나른하고 은밀한 목소리 때문에 검붉은 떡볶이 양념이 문란해 보인다. 물엿을 많이 넣어 문란한 양념을 콕콕 찍어 먹어먹다가 결국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튀김을 먹으면서 2차로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이사람들, 맘에 든다. 돼지바와 찰떡 아이스를 고르는 건 더 마음에 들고.



어떤 하루를 보냈든 달콤한 디저트를 베어 무는 순간 온몸에 퍼지는 안온감은 언제든 가장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행복의 표상이다. 아직 이렇다 할 사무용품을 구비하지 않은 책상(이후로도 뭘 구비할 생각은 없다.)에도 맥심 커피믹스(언제부터인지 맥심 취향은 부끄러운 것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맥심을 마신다.), 초콜릿 한 통은 진작부터 자리 잡고 있다.

 

휴일을 향해 가는 퇴근 열차. 예상대로 집도착하기 전 떡볶이의 힘이 떨어졌다. 집 근처 먹자골목에 내려 집순이 동생을 불러냈다. 같이카페로 가는 길에 초코 범벅 도넛을 하나 사고, 카페에서 크림 범벅 크로와상을 샀다. 살찌니까 음료는 아메리카. 초코 범벅 도넛을 입에 물고 나니 기운을 차릴 것 같다.


나 이직한 지 일주일 겨우 지났다. 한달은 다닌 거 같은데. 집이 겁나 멀어. 이렇게 돈 벌어야 되나. 땅 파서 돈 나오면 좋겠다. 땅 파는 것도 힘들겠지? 노동의 가치는 누가 정하는 거냐.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크림과 초코를 반씩 포크 위에 올려 먹고 아메리카노를 쪼옥 빨아먹었다. 인생에, 노동의 모든 순간에 당이 없다면, 당과 함께 할 커피가 없다면 우리는, 아니 나는 노동을 이어갈 수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지속 가능한 노동의 제1조건은 daily sweets 인 것을 부정할 사람 누구인가. 당신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어느새 10시가 다 되었다. 집으로 갈 시간이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다가 아이스크림 집에 들렀다.


자모카 아몬드 훠지 많이 주세요. 엄마는 외계인 주시고요. 피스타치오 아몬드는 조금만 넣어주세요.


아이스크림은 오랜만이다. 2주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것 같다. 우리 자매가 패밀리 사이즈를 못하는 건 순전히 냉동실에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일지 모른다.


내일은 연남동에 확장 이전했다는 케이크 샵에 가기로 했다. 예쁘고 맛 좋은 버터크림 케이크가 있다고 하니 일찍 집을 나서야겠지?


오늘도 함께 해준 당. 고마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영혼이 있을 것만 같아서 자꾸 말을 걸고 싶다. 매일 곳곳에 당을 끼워 넣으며 오늘을 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달콤한 걸로 덧바르고 잊고 버티면 좋은 날도 있겠지. 내일 아침에도 커피와 서랍 속 마들렌이 기다리는 사무실로 힘내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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