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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un 14. 2018

종로 안녕

광장 옆으로 출근한 지 3주 차. 새로운 시간 친해고 공간과도 정을 쌓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금요일 아침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눈을 떴다. 비비적 자리나 뭉개고 있기엔 아침 공기가 아까워서 채비하고 집을 나섰다. 종로의 아침을 좋아하는 지인이 몇 있다. 동생이는 사람 많은 시간을 피해 도시 산책을 즐기는 취향인데 새벽 5시에 일어나 성북동 일대를 걷거나 출근시간을 피해 종로를 거닐다 점심 전에 들어와 침대로 들어가곤 했다. 7시쯤 피맛골 걷는 게 좋다는 친구도 있었다. 범행 현장을 다시 찾는 범죄자처럼 전날 술 마시고 휘적거리던 종로에 다시 가서 커피 해장을 하는 친구였다. 음식 냄새와 사람들로 꽉 찼던 전날의 골목을 걸으면 종로의 주인이 된 것 같다나. 언젠가 나도 종로의 주인 같은 기분을 느껴보려면 지리부터 익혀야지.



멍 때리다 졸다 깨다 하다 보니 어느새 시청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 낮게 흐르는 아침 공기는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상쾌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회사를 가운데 두고 주변을 크게 돌아 걸어봐야지. 광장을 등지고 골목 초입에 서서 킁킁, 공기 냄새를 맡다.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전날의 술과 안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스팔트에서도 두부조림이나 철판 순대볶음 냄새가 날 것 같다. 배가 고파질 수  있니까 빨리 밟아서 냄새를 지워버려야지. 처음 걷는 골목길은 흥미롭다. 천천히 걸으둘러본다. 골목 사이를 걷다가 청계천으로 나가니 양쪽으로 직장인들이 줄지어 빠르게 걸어간다.


나만 천천히 역방향으로 걷는다. 남의 공간일 때 종로를 제대로 익혀보려고 한 적이 없다. 종로의 카페와 음식점을 잠시 들렀다 가면서도 머릿속에 공간을 펼쳐  익히려는 생각조차 해보질 않아서 종로는 거미줄 같은 모습일 뿐이었다. 이제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퇴근 후 찾아오는 친구들을 안내하면서 나만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익숙한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걷는 것도  공간과 친해지는 좋은 방법이다. 일주일에 한 두번씩은 종로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며칠 전에는 종로에서 근무하는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었다. 전 세계 직장인들의 공통 과제인 “점심에 뭐 먹을까?”를 논제로 올렸다.


밥 사는 사람이 추천해봐.  
내가 먹어본 것은 쌀국수 두부보쌈, 닭 한 마리
메뉴 외우고 다니냐? 두부보쌈부터 묘사해봐.
이름은 두림이란 곳으로써 전통가옥 느낌의 통창이 인상적인 매장에 들어서면 4월에 다녀가신 박원순 시장님의 사인이 보입니다. 국수/낙지/두부 조합이나 보쌈/두부 조합인데 손두부 맛이 좋고 기본 반찬 역시 충실하게 나와서...
어유 야 그만. 나 침 나왔어.
한상 가득 차려놓으면 양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인데 사람이 늘 북적거리지요.
이런. 거기로 가자.



방금 깨달은 것인데 공간과 친해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무얼 먹느냐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좋은 경험을 쌓는 거지 뭐. 두림에서 좋은 사람과 맛있게 먹으면서 근황을 나누었다. 서로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처지라 마음이 통했다.


회사가 회사지 뭐.
그래도 저번보다 심한 사람은 없어.
다 견딜 만 해.
어머, 나도 비슷해.

 

구수한 두부 한 조각에 매콤한 낙지를 올려 왕 입속에 밀어 넣으면서 대화를 이었다.


회사 근처에 산책할 곳이 많아서 좋지 않냐?
나는 밥 먹고 청계천 산책하는 게 참 맘에 들어.
난 경복궁 산책하는데 괜찮은 전시도 볼 수 있고 혼자 걸으면 의외로 되게 괜찮더라.


우리가 이 공간에 정 붙이는 방법을 나누는 동안 식사가 끝났다. 비엔나 커피 유명하다는 집에서 커피를 사 가지고 지난 몇 주 간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던 골목을 산책했다.  곳곳에 걸터앉은 직장인들이 보인다. 우리 둘 빼곤 모두가 그곳의 주인인 듯 익숙해 보인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저녁 종로를 한 바퀴 걷는다. 지난번보다 오 더 멀리 걸어본다. 조금 헤매다 지도 앱을 의지해서 서울역까지 걷는다. 회사 주위를 조금씩 넓게 걸면서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10년을 걸었던 여의도만큼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익숙한 것 하나 없는 생활인데 무엇이든 익숙한 것을 만들어두려면 당분간 더 많이 걸어야겠다. 지금은 종로의 시간을 읽으면서 나의 시간을 입히는 중이다. 새로운 출근시간에는 이제 겨우 익숙해졌다. 지각인가! 하고 깜짝 놀라 눈을 뜨는 일은 이제 없다. 공간에도 곧 익숙해지겠지. 어쩌면 운이 좋아 아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고. 사실 시간과 공간과 친해지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업무와 살가워지는 것이다. 오늘도 쓸려가지 않으려고 애쓴다. 꼼꼼히 적어가며. 하나씩 하나씩 인사를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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