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옆으로 출근한 지 3주 차. 새로운 시간과 친해지고 공간과도 정을 쌓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금요일 아침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눈을 떴다. 비비적 자리나 뭉개고 있기엔 아침 공기가 아까워서 채비하고 집을 나섰다. 종로의 아침을 좋아하는 지인이 몇 있다. 동생이는 사람 많은 시간을 피해 도시 산책을 즐기는 취향인데 새벽 5시에 일어나 성북동 일대를 걷거나 출근시간을 피해 종로를 거닐다 점심 전에 들어와 침대로 들어가곤 했다. 7시쯤 피맛골 걷는 게 좋다는 친구도 있었다. 범행 현장을 다시 찾는 범죄자처럼 전날 술 마시고 휘적거리던 종로에 다시 가서 커피 해장을 하는 친구였다. 음식 냄새와 사람들로 꽉 찼던 전날의 골목을 걸으면 종로의 주인이 된 것 같다나. 언젠가 나도 종로의 주인 같은 기분을 느껴보려면 지리부터 익혀야지.
멍 때리다 졸다 깨다 하다 보니 어느새 시청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 낮게 흐르는 아침 공기는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상쾌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회사를 가운데 두고 주변을 크게 돌아 걸어봐야지. 광장을 등지고 골목 초입에 서서 킁킁, 공기 냄새를 맡는다.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전날의 술과 안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스팔트에서도 두부조림이나 철판 순대볶음 냄새가 날 것 같다. 배가 고파질 수 있니까 빨리 밟아서 냄새를 지워버려야지. 처음 걷는 골목길은 흥미롭다. 천천히 걸으며 둘러본다. 골목 사이를 걷다가 청계천으로 나가니 양쪽으로 직장인들이 줄지어 빠르게 걸어간다.
나만 천천히 역방향으로 걷는다. 남의 공간일 때는 종로를 제대로 익혀보려고 한 적이 없다. 종로의 카페와 음식점을 잠시 들렀다 가면서도 머릿속에 공간을 펼쳐 익히려는 생각조차 해보질 않아서 종로는 거미줄 같은 모습일 뿐이었다. 이제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퇴근 후 찾아오는 친구들을 안내하면서 나만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익숙한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걷는 것도 공간과 친해지는 좋은 방법이다. 일주일에 한 두번씩은 종로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며칠 전에는 종로에서 근무하는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었다. 전 세계 직장인들의 공통 과제인 “점심에 뭐 먹을까?”를 논제로 올렸다.
밥 사는 사람이 추천해봐.
내가 먹어본 것은 쌀국수 두부보쌈, 닭 한 마리
메뉴 외우고 다니냐? 두부보쌈부터 묘사해봐.
이름은 두림이란 곳으로써 전통가옥 느낌의 통창이 인상적인 매장에 들어서면 4월에 다녀가신 박원순 시장님의 사인이 보입니다. 국수/낙지/두부 조합이나 보쌈/두부 조합인데 손두부 맛이 좋고 기본 반찬 역시 충실하게 나와서...
어유 야 그만. 나 침 나왔어.
한상 가득 차려놓으면 양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인데 사람이 늘 북적거리지요.
이런. 거기로 가자.
방금 깨달은 것인데 공간과 친해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무얼 먹느냐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좋은 경험을 쌓는 거지 뭐. 두림에서 좋은 사람과 맛있게 먹으면서 근황을 나누었다. 서로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처지라 마음이 통했다.
회사가 회사지 뭐.
그래도 저번보다 심한 사람은 없어.
다 견딜 만 해.
어머, 나도 비슷해.
구수한 두부 한 조각에 매콤한 낙지를 올려 왕 입속에 밀어 넣으면서 대화를 이었다.
회사 근처에 산책할 곳이 많아서 좋지 않냐?
나는 밥 먹고 청계천 산책하는 게 참 맘에 들어.
난 경복궁 산책하는데 괜찮은 전시도 볼 수 있고 혼자 걸으면 의외로 되게 괜찮더라.
우리가 이 공간에 정 붙이는 방법을 나누는 동안 식사가 끝났다. 비엔나 커피 유명하다는 집에서 커피를 사 가지고 지난 몇 주 간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던 골목을 산책했다. 곳곳에 걸터앉은 직장인들이 보인다. 우리 둘 빼곤 모두가 그곳의 주인인 듯 익숙해 보인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저녁 종로를 한 바퀴 걷는다. 지난번보다 오늘 더 멀리 걸어본다. 조금 헤매다 지도 앱을 의지해서 서울역까지 걷는다. 회사 주위를 조금씩 넓게 걸으면서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10년을 걸었던 여의도만큼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익숙한 것 하나 없는 생활인데 무엇이든 익숙한 것을 만들어두려면 당분간 더 많이 걸어야겠다. 지금은 종로의 시간을 읽으면서 나의 시간을 입히는 중이다. 새로운 출근시간에는 이제 겨우 익숙해졌다. 지각인가! 하고 깜짝 놀라 눈을 뜨는 일은 이제 없다. 공간에도 곧 익숙해지겠지. 어쩌면 운이 좋아 아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고. 사실 시간과 공간과 친해지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업무와 살가워지는 것이다. 오늘도 쓸려가지 않으려고 애쓴다. 꼼꼼히 적어가며. 하나씩 하나씩 인사를 나누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