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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y 10. 2018

노란색의 의미는 '주의'

인생의 모든 시기에는 적당한 고민이 배치되어 있다. 앞서 궁금해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준비된 고민을 만난다. 7살의 가장 큰 고민은 미술수업이었다. 그림 한 장 완성하는 데 하루 종일 걸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 시간표에 겨우 2교시만 내어주고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냐. 자주 쓰는 크레파스 색을 도열하고 스케치만 하기에도 2교시는 모자라다. 나는 미술수업이 있는 날이면 종례시간까지 도화지를 펼쳐놓고 색칠하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크레파스만 잡아도


어머, 둥둥이가 크레파스를 잡았어. 왼손잡이인가? 아니야 왼손으로 잡은걸 오른손으로 넘겼어! 의외로 평범한 오른손잡이였군.


하고 애들이 수근 거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주변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으로 대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도 1학년 때 우리 반에 누가 있었는지,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이제는 그때 기억을 했더라도 잊어버리고도 남을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애초에 기억을 하지 않은 것은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어디에서도 벽지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싶은 나의 성정은 그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것 같다.



미술수업이 있는 날엔 여지없이 누군가 의도했던 대로, 예견되어있던 대로 종례시간까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끙끙거렸다. 시간표를 짠 검은 세력이 숨어서 내 곤란한 표정을 보며 통쾌하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양손은 온갖 크레파스 색이 묻어 거뭇거뭇하고 뻑뻑했다. 하지만 시간을 내어 어떻게 손을 씻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 그림을 그리느라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애는 본 적이 없는데. 내가 그 첫 번째가 될 수는 없다. 다행인 것은 마음이 넓은 50대 중후반의 담임선생님은 종일 독자적 미술수업을 이어가는 학생을 다그치지 않고 매섭게 노려보지도 않았다. 가끔씩


둥둥이, 자꾸 떠들지 말고 빨리 색칠해야 종례 전에 완성할 수 있다.


하고 산만한 정신을 챙겨주셨다. 하지만 급우들의 힐끔거리는 시선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 미술 수업할 거면 시간표에 종일 ‘미술의 날’이라고 써주실 순 없나요? 시간이 너무 모자라는 건 싫어요.) 네에...



시간이 남들보다 길게 필요했던 원인을 몇 가지 추측해 본다.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스케치에 오랜 시간을 들인다는 것이다. 밑그림은 늘 노란색으로 그리라고 배웠다. 혹시 잘못 그린 밑그림은 나중에 채색으로 덮어야 하니까 옅은 노란색을 쓰라고 했다. 그렇지만 채색으로 덮어도 희미하게 보이는 노란 선이 나에겐 빨간색이나 파란색과 다르지 않게 눈에 띄었다.


이렇게 잘 보이는데, 정말 색칠하면 이게 가려진다는 거야? 색이 덮이면 오히려 그 부분만 색이 달라서 더 이상하잖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수채화 그리는 날은 완전히 망하는 거다. 물감은 절대 크레파스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밑그림을 그리다 실수를 할 때마다 스케치북을 넘겼다. 고작 선 하나만 죽 긋고 스케치북을 넘긴 적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진지했다. 그렇게 공들여 스케치를 하고 나면 2교시는 훌쩍 지나버린다.




가끔 선을 잘못 그리고 스케치북을 넘기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어른이 돼서도 나는 스케치북을 넘긴다. 관계에 잘못 그어진 선을 어쩌지 못하고 채색으로 덮어도 자꾸 또렷하게 신경 쓰이는 노란 선 때문에 스케치북을 넘긴다. 미술시간을 넘기고 종례 때까지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그때처럼 오랫동안 관계의 숙제를 풀지 못하고 쩔쩔맨다. 어느 날 친구가 좋은 대안을 제시해줬다.


둥둥 아, 처음부터 노란색으로 그리지 마. 나처럼 상아색으로 그리고 실수하면 그때 다시 노란색으로 밑그림을 그려봐.


그건 잠시 동안 꽤 쓸 만한 대안이었다. 잠시만 그랬다. 나는 흐리건, 짙건 상관없이 잘못 그어진 선에 집착했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어차피 하찮게 여겨질 선 따위에 집중해서 찝찝함을 떨쳐내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잘못 그어진 선이 아니라 완벽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모든 걸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는 사랑하는 친구들의 모든 걸 좋아해야 한다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스케치북을 넘기기 전에 그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하물며 가깝지도 않고 그럴 일도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스케치북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천천히 그리고 한 박자 쉬면서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바라보는 여유도 나에겐 없었다.


스케치북 누가 이렇게 쓰랬어!


하고 엄마가 등짝을 후려치기 전에 조심스럽게 그리는 게 좋은데. 맞으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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