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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ul 31. 2018

제가 제일 못할 수 있어요.

월급 앞에 다짐하기를,     


헛된 지출을 하지 않고 쓰임새를 다듬어서 후회 없이 재정관리를 해봐야지. 한 달을 뿌듯하게 보내봐야지. 이왕 쓸 돈이라면 뻔하게 쓰지는 말아야지.      


결의를 다지던 지난달, 전혀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뻔하지 않은 소비활동의 기회가 온 것이다. 옆자리에 앉는 요가 마니아 코코님이 날씨를 몸으로 표현하는 프로그램에 함께 가자고 했다. 거절하기도 어색하고 새로운 활동에 돈 쓸 기회이기도 해서 덥석 물었다. 댄스, 요가, 필라테스를 접목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요가복이 없는데 어쩐담. 동생이를 데리고 몇 번 운동복 코너를 기웃거렸는데 동생이가 극구 말렸다.      


한 번 하고 안 할 건데 사지 마. 작년에도 달리기 본격적으로 할 것처럼 운동복 사더니 어디에 쳐 박아뒀어?
그렇지만 티켓 예매할 때 보니까 사진에 사람들이 막 본격적으로 입고 있었는데?
그건 홍보용이잖아. 에이그!     


동생이를 때 놓고 다시 한번 운동복을 사기 위해 쇼핑몰에 들렀지만 이미 자금상황이 지난주 같지 않았다.     



아, 망했어. 역시 주말에 샀어야 했어. 분명 내가 제일 못할 텐데 운동복이라도 있어야 눈에 덜 띄잖아.      


그러나 운동복의 가격을 보면 다시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래, 동생이 말이 맞지. 다음에 정말 요가든 뭐든 다시 하게 되면 그때 사도 늦지 않다. 운동복은 포기하고 옷장을 뒤져본다. 분명 작년에 산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로 갔담. 날이 더워 오래 찾을 기운도 없다. 결국 손에 잡히는 반바지, 티셔츠를 가방에 훽 집어넣고 벌렁 누웠다.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스트레칭이라도 좀 해야 했는데. 근데 그게 또 뭐 며칠 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너무 못하면 안 되는데. 생각하다 눈 떠보니 아침이다. 아 몸이 찌뿌둥하다. 바닥에서 잠들어 버렸더니 등이 배긴다. 요가하기 좋지 않은 상태다.      


오후 외근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빠듯했다. 한남동에 거의 이르러서 코코님이 또 좋은 제안을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없으니까 가는 길에 빵집에서 가볍게 뭐 하나 대충 먹고 갈까요?


아! 빵집 입구에서 탄식하고 말았다. 그곳은 타르틴 베이커리. 오픈 전부터 눈여겨보았던 그곳, 와보고 싶어서 애 닳게 염원하던 곳.      



(타르틴 베이커리가 왜 거기 있어? 내가 이 길을 두 달 사이에 세 번째 지나가고 있는데 그동안 나 몰래 숨어있었던 거야? 오늘처럼 이렇게 여유 없을 때 오게 되면 안 되는 곳인데.) 저, 여기 정말 좋아해요.      


시간의 압박 속에서 빠르게 모든 메뉴를 잠시 머릿속에 담아보다가 마침내 코코넛크림 타르트를 골랐다. 크림 맛은 평범했지만 파이지는 1980년 대 이후 내가 먹어온 세상의 모든 타르트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맛이었다. 역시! 본격적인 소비를 위해 다시 와야 한다. 동행은 이미 정했다. 타르트를 먹으면서 코코님께 당부했다.      


코코님, 제가 부끄러워도 우리 사이 멀어지거나 하진 말아요.
에이, 저도 비슷해요. 얼마나 뻣뻣한데요.
(정말요? 두고 볼 거예요.) 하하. 저는 정말인데.     



아슬아슬 시간에 맞춰 ‘그곳’(사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은 공연인지, 운동인지, 춤인지 모를 그냥 ‘그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하는 ‘그곳’에 간 것이다.)에 들어선 순간 나는 자책했다.      


거봐! 운동복 샀어야 했는데. 동생이 이 녀석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매사이트에서 봤던 사람들처럼 본격적인 의상을 갖춰 입고 있었다. 요가 레깅스에 탑을 입고 팔다리를 쭉쭉 찢, 아니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오늘 다시 마션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나만 빼고 전 국민이 국민 체조하듯 요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 모양새. 느낌이 좋지 않다. 머쓱해진 채 옷을 갈아입고 자리를 잡았다. 코코님께 미리 언지를 주었지만 직접 보면 당혹스러울 수 있으니 우리 둘 사이엔 누군가 있는 것이 좋겠는데, 두리번거리는 내 옆으로 방금 캘리포니아에서 아침 조깅하다가 한국까지 달려버린 것 같은 언니가 자리를 잡았다. 아, 다행이다. 요가를 하면 영혼이 맑아지고 사람 마음이 들리고 그러나 보다. 들썩들썩 음악이 시작되고 강사님이 간단한 프로그램 소개를 했다.      


자, 잘 이해하셨죠?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요? 이제부터 50분 동안 논스톱으로 진행됩니다.      
(뭐라구요? 아, 잠시 만요. 논스톱이란 말은 예매 사이트에서 못 본거 같은데요? 저 사실 말 못했는데 어젯밤에 바닥에서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몸상태가 더욱 요가하기에 부적절한 상황인데요.)      



이번에도 당황한 건 나뿐이었다. 다들 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이미 스텝을 밟고 있다. 등골이 오싹하다. 롤러코스터에 올라타니 “안전벨트는 없습니다.”라던 고전 괴담이 떠오른다. 나는 브레이크 없는 지옥행 요가 열차에 올라탄 것이다.       


런지, 플랭크, 같은 동작은 그나마 쉬운 축에 들었다. 나만 리듬감이 없는 건지, 이미 박자를 놓친 지 오래. 지시를 따라주지 않는 팔다리는 진작에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아득해진 정신머리를 끝내 놓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이 풀리고 선생님이 흐릿해진다. 헤엑, 헤엑, 올여름 이렇게 땀을 흘리긴 처음이다. 처음 코코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 나는 건강과 활력에 돈을 지불했다고 생각했는데, 고생을 산 것이었다. 내일 아침잠에서 깨면 마일리 사이러스 하체운동을 처음 했을 때의 고통을 다시 맛볼 수 있겠구나.      


자, 앞에 화면을 보면서 오늘 나의 날씨는 어떤 지 생각해보세요.      


생각을 하라니, 너무 하네. 생각하는 대신 사람들을 살폈다. 그렇지. 나만 이렇게 못하지. 이제 그런 모든 것들이 죄다 당연하게 느껴진다. 어느새 막바지에 이른 “사서 고생”프로그램. 선생님이 바닥에 앉더니 양다리를 180도로 쭉 찢는다. 그리고 가만히 편안하게 몸을 앞으로 라는 헛웃음 나는 말을 하셨다. 이미 포기상태로 꼿꼿이 허리를 세운 나. 바람이 쓸고 간 언덕배기 들풀처럼 스르륵 몸을 눕히는 사람들.      

하아, 마침내 끝. 볼이 발그레해진 코코님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저도 즐거웠어요. 이렇게 몸을 쓰는 건 참 오랜만이었는데.      



후들후들하지만 걸을 만하다. 무엇보다 이대로 지하철에 오를 수 없다.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요가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로 소프트랜딩 하려면 더욱이 걸을 필요가 있다. 밤바람이 좋다. 천천히 걸으니 어쩐지 개운한 것도 같다. 선생님은 생각하라고 하셨지만 생각 없이 몸을 쓰고 나니 머리도 가볍다. 결코 뻔하지 않은 소비활동이었다. 제법 성공적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돈은 쓰는 맛이다.      


사실 사고 싶었던 건 특별함, 새로운 방향성이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어떤 증거를 찾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 개연성이 전혀 없더라도.     


오늘의 특별한 소비는 일단 성공. 다음 뻔하지 않은 소비는 타르틴 베이커리인가. 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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