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Paul Apr 14. 2018

운동장에서 하늘 보기

중학교 교장선생님은 정년퇴임을 앞둔 할아버지 선생님이었다. 우리끼리는 KFC 할아버지라고 나름 친근감을 더해 불렀던  그분은 검소한 생활 습관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오늘 자전거 타고 출근하시는 거 봤어?
봤어 봤어. 신기했어. 안 넘어지고 되게 잘 타시더라.


3월 내내 우리의 호기심은 교장선생님의 자전거 등교에 쏠려있었다. ‘승용차 아닌 자전거 타는 교장선생님’만큼 생소한 일이 많았다. 틈틈이 교내를 산책하시며 쓰레기를 주우셨고 외부 행사가 있는 날에는 동석했던 선생님, 학생들과 자장면을 시켜 드셨다. 점심시간에는 학생과 섞여 사모님이 싸주신 도시락을 드시기도 했다. 교장선생님과 겸상은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교장선생님 중 권위의식에서 가장 멀리 계신 분이었다. 보통의 경우 학생들이 교장선생님을 마주할 기회는 일주일에 한 번, 운동장 조회 때뿐이다. 복도, 운동장, 매점 근처, 심지어 교실. 이렇게 우리의 동선 곳곳에서 교장선생님을 마주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신기하고 기쁜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운동장 조회 때 훈화가 더 듣기 좋았던 건 아니다. 할 말이 하루 종일 쏟아지는 사춘기 아이들이 30분 동안 가만히 서서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게다가 교장선생님들의 훈화는 지루하고 의미 없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3년 내내 똑같은 훈화를 들었는데


자, 3월의 이름 있는 날에 대해 알아봅시다.


로 시작해 12월까지 매월의 이름 있는 날을 읊어주셨다.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자 다시 시작된 3월의 이름 있는 날. 학생들은 당시 구간반복 기능 카세트로 유명했던 ‘아하프리’(LG전자)를 별명으로 붙여드렸다. 매월 의미 있는 날의 어떤 의미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고 교장선생님에게 의미 있는 것인지 아무도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의미 있는 날들의 이야기가 의미 없이 흘렀다. 매달 청명, 곡우, 우수, 망종 같은 24절기 중에서도 낯선 날들까지 끄집어 내 훈화하셨다. 교장선생님의 오묘한 의도를 알 수 없는 3년이었다.


‘이 달의 의미 있는 날’ 뿐 아니라 공교육 12년간의 어떤 훈화도 인상적이지 않았다. 전국적이 공식적인 시간낭비라 할 수 있다. 혹시 훈화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사람들이 있다면 대단한 행운을 잡은 것이다. 어쨌거나 그 와중에 딱 하나 기억에 남은 훈화가 있다. 바로 ‘KFC 할아버지’ 교장선생님의 훈화다. 특별한 날도 아니었고 특별한 주제도 아니었다. 늘 하시는 지루하고 전형적인 좋은 말, 흔한 이야기였다.


여러분, 염치가 뭔지 아세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혼자 있을 때에도 하늘은 여러분을 보고 있어요. 그때,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염치입니다. 염치를 잃지 말아야 해요.


신기하게도, 아니 너무 중요한 말이었기에 몇 년에 한 번씩은 그 말씀이 생각났다. 훈화의 주인공께서는 그날 유독 목소리를 높이셨고 긴 말씀을 마치기까지 염치 있게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셨다. 열정적인 훈화는 보는 사람 없다고 교내 여기저기 쓰레기를 버리고, 교장선생님 자전거에 빈 우유팩을 끼고 가는 염치없는 짓을 하지 말자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위엄이 되기도 하고 기품이 되기도 하고 덕이 되기도 하지만 그저 기본이 되는 것. 염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그 날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기억에 남았을까.


한국어에만 있는 특이한 표현이 ‘모른다.’라고 하더라. 영어에는 모른다가 없다. “I don’t know”는 ‘알지 못한다.’ 일 뿐. ‘모른다’는 순수한 말이다. 무책임한 말이다. 염치없는 말이기도 하다. 몰라서 저지르는 잘못도 죄가 된다. 심지어 꽤 자주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된다. 가장 무서운 폭력은 무지에서 나온다는 생각마저 든다. 유시민 작가님의 조언에 따르면 나이 드는 요령이 있다고 한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내가 모르고 있다.', 는 것을 항상 전제하는 것이다. '나는 몰랐어.'라는 내 말 때문에 상처 주지 않으려면, 시나브로 내 행동이 폭력성을 갖지 않으려면. 조심스러워야겠다.


요즘 학생들도 월요일마다 운동장에 모여 지루한 훈화를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젠 미세먼지 때문에 운동장에 모이기도 예전 같지 않을 테고 교내 방송 시스템이 더 좋아졌을 것이 분명한데. 오늘도 약 20여 년 전 훈화에 뜨끔한 마음으로 염치없이 살지 않으려도 애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누군가에게 불편 끼치지 않는 삶. 누군가의 불편을 담보하지 않고 스스로 제 삶을 제법 꾸려가는 것이면 부끄러움 없이 제법 밥값은 하고 산다고 해도 되겠지? 애쓰자. 매일. 나의 편리가 누군가의 불편 위에 올려지지 않도록. 근데 벌써 몇 명이 떠오르고 있다. 뜨끔뜨끔.

매거진의 이전글 노란색의 의미는 '주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