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독립하면서 알게 된 것들 -
“주말에 뭐했어?”
어느 평범한 월요일에 한 회사 선배가 물었다. 마침 기분 좋은 주말을 보내고 온 터라 “집에서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컬러링 북을 색칠했는데, 그 날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까지 좋아서 너무 좋더라고요.”라고 해맑게 대답했다.
나이가 열두 살 정도 많았던 그 선배는 “너 언제까지 주말에 혼자 색칠 공부하는 게 재밌을 것 같니? 마흔 살 넘어서도 재밌을까?”라고 일침을 날렸다.
그 말은 화살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제대로 명중했다. 잠자고 있던 불안감의 씨앗에 싹이 텄고, 그 후로 한동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으로 괜히 바쁘고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선 꽤 오래 쉬고 있던 소개팅에 박차를 가했다. 소개팅이란 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성공률이 0%다. 이제 막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게 된 상대방과 짧은 만남 속에서, 서로 비슷한 정도의 호감과 신뢰를 느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체험하는 시간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아무래도 내가 찾는 인연은 이렇게 긴급하게 구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선배의 따끔한 말 때문에 시작된 일일지언정 진짜로 뭐라도 하다 보니 새로 알게 된 게 많았고, 내 나름대로 현실과 나 사이의 타협점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올해 들어 ‘예전에 비해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거칠게 줄여서 말하자면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타입이다. 식사 메뉴를 고를 때 나를 본다면 결단력 있는 사람으로 오해할 만큼 ‘결정 장애’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큰 결정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한다. 반드시 해야 한다면 비교적 예측이 가능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쪽으로 선택하는 편이다.
이런 나에게 익숙하고 살기 좋은 군산을 떠나 전주로 이사 가겠다는 결정 역시 쉽지 않았다. 혼자 살 집을 구하는 일은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아파트 구입은 커녕 전세도 공포였기에 일단 월세를 구했다. 작은 임대 아파트지만 아파트라서 모든 가전 가구를 직접 사들여야 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혼자 사는 동안 잠깐 쓰다가 버린다고 생각하면서 중고제품이나 중소기업의 저렴한 제품으로 고를지 아니면 오래 쓸 요량으로 브랜드 네임이 있는 비싼 제품을 고를지 결정하는 일은 지금 당장 내 미래를 결정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져서 알아보기조차 싫었다. 덕분에 이사한 후 일주일 넘게 냉장고가 없어서 아이스박스에 음식을 넣어두고, 빨래는 한쪽에 쌓아두고 사는 믿고 싶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더는 결정을 미룰 수 없었다. 몇 가지 가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오래 쓸 각오로 값이 좀 나가는 제품들로 빠르게 구매해나갔다. 정신없이 혼자서 집을 구하고 이삿짐센터와 계약하고, 크고 작은 집안 살림들을 들이는 나를 지켜보면서 오히려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고 어떤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선택지든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더라도 무언가를 선택해나가야 한다는 현실도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결정 당시의 내가 원하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자유로써 큰 의미가 있었다. 더불어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써 따라오는 단점이 아닌 ‘장점’과 ‘기회’에 집중하고 잘 즐길 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 취향과 손길이 담긴 물건들로 채워진 혼자만의 공간에서 사는 일은 정말 행복하다. 우리 집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꼭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편안한 기분이 든다. 이사 오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가족들도 괜찮은 하우스 메이트였다고 생각했지만, 혼자 살면서 진정한 고요와 평화가 무엇인지 알았다.
어떤 분이 SNS에 혼자 사는 사람의 혼잣말 1-2-3단계에 대해 재밌는 글을 올린 것을 봤었는데 나 또한 자기와의 대화 실력이 날로 늘고 있다. 집에 혼자 있다가 문득 오늘 저지른 실수가 생각나거나 내 처지가 불행하게 느껴질 때에는 얼른 위로의 말을 스스로에게 건넨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어.”
“그렇게 잘 안 해도 되고, 그냥 대충 살아도 돼.”
“내가 알아. 오늘도 정말 애썼어.”
다른 친구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해줬을 말들이다. 다른 사람한테 들었을 때만 효과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직접 나에게 소리 내어 말해주면 마음 저 깊은 곳까지 슬그머니 위로가 된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 작은 집이 가진 마법인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내 마음 속을 보여주고 싶은 친구들을 곰곰이 떠올려보면서 초대할 사람 명단과 일정을 혼자 짜보고 수줍게 연락해보는 일도 요즘에 찾은 즐거움 중 하나다.
집에서 이 책 저 책 읽다가 펼친 채로 뒤집어서 부엌이고 거실이고 할 것 없이 여기저기 책을 두곤 하는데, 이것도 누군가와 함께 살았다면 꾸지람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상상해보면서 이런 소소한 자유로움을 충분히 만끽하려고 한다.
어떤 선택이든 영원히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내가 한 선택을 막연하게 불안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면서 지내지도 않는다.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과감하게 선택하고 누리는 일에 최대한 집중한다.
이 모든 것은 실패하더라도 집안 살림을 일단 사서 써 봐야 다음엔 더 편리하고 좋은 것을 잘 고를 수 있다는 것을 해봐서 알게 된 덕분이다. 잘못 산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