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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펑예 May 28. 2024

운전 예찬

운전할 수 있어 다행이야

심야식당 오프닝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은 심야의 도쿄를, 달리는 차에서 바라보는 앵글의 영상으로 시작된다. 어쿠스틱 기타 연주에 맞춰 나이가 지긋한 남자 가수의 읊조리는 듯한 노래까지, 도시의 밤이 주는 애수가 터진다. 드라마의 본 스토리를 보는 것도 잊고 나는 하염없이 그 오프닝을 돌려봤었다.     

잠 못 드는 고망이를 재우기 위한 명목으로 자정이 넘은 밤, 차를 몰며 도시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 그래서 힘들기보다는 약간은 즐거웠다. 괜히 한강 공원까지 가서 야경을 바라보며 차 안에서 뭔가를 먹거나 마실 때는 밤 피크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약간의 피로함과 새벽 라디오 방송도 정취를 더 했다.


"우리가 나가고 싶어서 그랬던 거지."


돌아보니 남편 J의 말에 과연 그랬다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한산해진 도로를 운전대를 잡고 달리는 기분이 그만이었다. 한층 자유로워진 기분. 무엇이든 못할 게 없다는 이상한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그러면서도 원인 모를 슬픔이 교차했다.

여하튼 낮동안 켜켜히 쌓인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내 드라이빙 라이프를 돌아보자면, 일단 20대 중반에 동생과 동거하며 함께 산 빨간색 소형차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자취생 신분치고는 빨리 구매한 편이었다. 순전히 동생의 제안 때문이었는데, 차를 몰고 매장을 관리하는 일을 했던 직업 특성상 주변 동료들의 자차 비율이 높아 본인도 그런 욕구가 일찍 생겼던 것 같다. 월세를 전세로 바꿀 생각은 않고 차를 덩달아 구입했다는 게 우리 둘 다 애초에 재산 모으기에 대한 관심은 없었던 게 아닌가 한다.(그즘 집 매매 열풍과 차를 사는 건 낭비라는 논조의 경제서들이 인기 있었다)

출퇴근은 지하철을 이용했고, 주말에 잠깐 장을 보거나 먼 거리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갈 때, 가아끔 자매끼리 놀러 갈 때나 차를 쓰다 보니 10년을 탄 시점에도 주행 거리 3만 킬로를 겨우 넘겼을 뿐이지만 '빨갱이'라고 이름까지 붙여 주며 차를 산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운동신경이나 반사신경이 좋은 편도 아니고 드문드문 운전을 하다 보니 운전 실력은 정말 느리게 늘었다. 그래도 총 15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하면서 경미한 접촉 사고 몇 건 외에 큰 사고 한번 없었다. 결혼을 하고서도 더 함께하다 출산 후 카시트 설치가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별했다.

하여간 나는 확실히 운전을 좋아했다. 장거리를 별 불만 없이 운전해 돌아온 어느 날, 고생했다는 주변 반응을 보면서 깨달았다. 이게 고생인가, 즐거웠는데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운전만 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져 남편과 싸운다는 지인들을 보면서 더 확실히 깨달았다.


최근엔 고망이의 매니저 일을 본업으로 하면서 운전은 일상이 되었다. 일찌감치 유모차를 거부했던 고망이를 제시간에 어린이집에 등하원시키고, 센터 그리고 종종 병원에도 데리고 가야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오롯이 독박 육아인 날, 키카니 놀이터니 마트니 공원이니 할 것 없이 어딘가로 가 숨통을 틔게 해주는 것도 문 밖에 차가 있어서 아닌가. 이제는 2시간 거리도 고망이를 혼자 데리고 갈 배포가 생겨 급 강원도 여행까지 가능해졌다.


운전 실력도 좀 늘었겠지만 상황 판단도 빨라졌다. 그리고 배포가 커지면서 좀 거칠어졌다. 안타깝게도 차만 타면 그 성미가 튀어나왔다. 단순히 위험해서가 아니다. 갑자기 야생동물이라도 된 듯 내 앞을 가로막고 무례하게 구는 - 차선을 제대로 지키지 않거나 갑자기 끼어든 - 차들을 향해 으르렁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아이 앞이라 차마 욕은 못하지만 거친 탄식과 언사가 입을 비집고 나온다. 이건 평소 억울하게 한 대 맞아도 제대로 반격할 만한 성격이 못 되는 나와는 좀 상반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차라는 외피를 둘러쓰고 센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여성'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드러났던 빨갱이와 달리 현재의 우리 차는 남색 빛이고 중형 세단이라 전혀 그런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게다가 이젠 나이도 많다!)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나이와 성별 앞에 주눅 들어 부당해도 쉽게 대거리를 할 수 없었던 약자의 삶이 길어서였을까. 그런 요소에 한 톨의 구애됨도 없이 클락션을 울려버리고 욕을 날리며(물론 차 안에서만) 액셀을 밟고 부앙~ 가버릴 때면 희열마저 느낀다.



이렇게 쓰고 보니 험난한 일상 속에서 뻣뻣해지고 쪼그라든 마음을 종종 운전으로 위로받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올해의 명장면 중 하나도 운전 중에 있었다. 폭설주의보가 울린 어느 겨울 아침. 고망이의 등원과 J의 출근을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차창으로 쏟아지고 사라지는 눈송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무심코 음악을 재생시켰다. 꽂아둔 것도 잊어버린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헨델 프로젝트> 앨범이었다. 차 안의 고요함을 피아노 선율이 가득 채워나가는 그 뭐라 할 수 없이 격조 높은 분위기에 아침부터 등원 전쟁과 러시아워로 내상이 심했던 내 입에서 "행복한 인생이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그것은 정말 진실이었다. 대체로 혼자보단 같이 해서 즐거운 게 더 많은 인생이지만 운전의 백미는 혼운이다. 아 혼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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