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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펑예 May 07. 2024

병원 놀이

별난 아이가 나쁜 아이인가?

오늘도 병원에 간다. 정확히는 소아과다. 어떤 날은 누런 코가 나와서 어떤 날은 기침을 많이 해서 어떤 날은 토해서 어떤 날은 열이 나서 어떤 날은 눈 근처를 부딪혀서 어떤 날은 눈꼽이 많이 끼고 빨개서. 작년부터 그렇게 숱하게 병원에 갔었다. 특히 어린이집 입소 후부터 감기는 상시 걸려 있는 수준이었고 항생제를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게 장기복용했다. 나았다 싶으면 또 걸리고 소강 상태라는 걸 짐작하는 게 무서울 정도로 다시 상태가 악화되기도 했다. 코로나 이후 면역 체계 문제인 건지 고강도 노동자여선지 아이가 걸리면 나 또한 걸렸고 잘 낫지도 않아 서로 고생이 심했다.


병원 대기는 무시무시했다. 인기 많은 병원의 경우 월요일, 토요일은 20명 이상의 대기자가 있곤 했다. 잘못하면 한 시간 반 이상을 대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소아과가 급격히 줄고 소아응급의가 없는 대학병원도 많은 판국에 동네에 소아과 선택지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하여간 그 정도로 길게 기다려야 하는 경우 10분 기다리는 것도 힘든 우리 고망이를 붙들고 있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건물 안을 배회하게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하고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기본, 그래도 안 되면 바깥으로 나가 주변을 한바퀴 돌기도 했다.(하지만 돌아오는 게 힘들어 이내 포기) 그 다음엔 창 밖 바라보며 자동차 이름 맞추기, 버스 찾기 놀이를 한다. 당연히 오래 못한다. 처음엔 그래도 할 게 없으면 시위라도 하듯 바닥에 드러눕는, 엄마로선 아찔한 만행을 일삼았다.

그리고 진료도 녹록치 않았다. 촉감이 예민하다보니 진료 과정에도 반항이 거셌다. 살갗에 와닿는 청진기도 싫고 귓속을 들여다보고 입을 벌려 목을 보는 것도 불편해 죽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울었다. 하이라이트인 콧물 빼기에는 간호사 선생님 한 분이 더 투입돼 나랑 셋이서 붙잡아야 가능했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호흡기 치료라도 있는 날이면 고비가 하나 더 남은 것이다. 코와 입을 종이컵으로 감싸야 하는데 막기는커녕 호수조차 잡아 빼는 일이 허다했다. 혀를 끌끌 차는 눈빛들이 보이는 것 같아 뒷통수가 엄청 따가웠다.

쓰다보니 고망이 뒷담화인데 하는 김에 더 해야겠다. 약국 가서 약 짓는 대기 시간도 전혀 기다리지 못해 밖으로 나가려고 야단이었다. 심지어 언젠가는 약사님과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 약국을 빠져나가 엘레베이터에 혼자 올라타는 일도 있었다. 괜히 고망이가 아니다. 고삐 풀린 순간 이때다, 이런 태도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아찔한 마음에 화도 나고 속상해서 차에 태워 야단치다가 같이 울기도 했다. 여하튼 병원 가는 일은 그래서 늘 부담스런 과제 중 하나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일단은 이 고난을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한다. 이제 병원 예약 어플이 생겨 미리 시간 맞춰 예약만 하면 1시간 이상을 대기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원이라는 공간과 진료 과정에 완전히 익숙해진 고망이의 성숙한 진료 태도는 감개무량할 정도다. 병원 안 공기가 견디기 힘들다는 듯 튀어나가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병원 내에서 책, 달력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며 앉아있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튀어 들어가 진료 의자에 앉아 티셔츠를 끌어올린다. 그리고 전 과정을 아주 협조적으로 참아낸다.(콧물 빼기에선 여전히 울지만 사람이 더 붙잡을 정도로 버둥대며 반항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호흡기 치료는 자기가 종이컵을 잡고 있기도 한다.

어느 날은 주사가 무섭다며 병원 들어서면서부터 우는 또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엄마가 우리 고망이를 가리키며 저렇게 의젓하게 인사하고 들어가자고 하는 걸 들었다.


'우리 고망이가 타의 모범이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초창기부터 고망이를 봐왔던 선생님들도 그러한 변화에 칭찬을 건네자 더 자신감이 생기는지 의젓한 행동을 보이는 고망이. '병원 좀 와본 녀석'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역할 놀이도 '병원 놀이'다. 진료 순서를 빠삭하게 알고 있고 치료 도구도 파악하고 있어서다. 의사를 했다가 환자를 했다가 자기 하고 싶을 대로 하긴 하지만 여전히 즐겨하는 놀이 중 하나다. 그리고 이제는 병원 가는 걸 놀이터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어떨 때는 괜히(?) 병원에 가자고 한다. 대기실에 있는 또래와 어른들, 낯선 의료 기구를 구경하고 진료실에서 진료를 받고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약국에 들러 약을 타는 일련의 활동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고 재미있는 놀이인 것이다.(물론 여전히 콧물 빼는 것은 두려워 하지만) 나 또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에 간다. 물론 아프지 않아 가지 않는 것이 제일 좋고 주차도 쉽지 않지만, 오늘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마음이 더 크다.


병원에만 오면 망나니가 된다고 괴로워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여서 힘들었던 같다. '별난 아이 키우느라 엄마가 고생이다' '훈육을 시켜야지' 하는 눈빛으로 보겠지, 다. 그런 의미에서 차분히 대기실에 있고 소란스럽지 않게 진료받는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말 잘 듣는 의젓한 아이',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른이 양육하기 좀더 수월한 아이'가 좋은 아이라는 식의 잘못된 잣대가 내 안에서 자동 작동된 거다. 날 뛰는 아이가 나쁜 아이일까. 그저 타고난 성향과 감각적 특성이 다를 뿐이다. 사회적 매너는 반복된 경험과 훈육으로 익히면 될 일이다.  


진료를 마치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고망이가 "우리 약국 거야" 한다. 마음속으로 나의 과오를 사과하며 "그래, 엘리베이터 타자"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눈빛이 달라진 고망이가 "계단 내려 갈래요" 한다. "계단? 그냥 엘리베이터 타자."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갑자기 바닥에 드러눕는 고망이. 


"안 갈래요~"


그래, 너무 급격히 바뀌는 건 안 좋아.  

나는 조만간 요 아래층 정형외과나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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