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펑예 Apr 02. 2024

너와의 산책

이걸 산책이라고 해야 할지, 행군이라 해야 할지 

"차 안 타요."

어린이집 하원 길이었다. 겨울 동안 군말 없이 잘 타던 차를 안 탄다는 걸 보니 날이 확실히 따뜻해졌다는 걸, 바야흐로 봄이 왔다는 걸 저도 알겠는 모양이다.

"차를 안 타면?"

"산책 갈 거예요."

차를 버리고 갈 수 없지 않니? 일단 집에 갔다가 산책하자, 고 '이성적으로' 달래본들, 곧장 집으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고 마음 굳힌, 자기 주장 지나치게 강한 39개월 아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5분 넘는 실랑이 끝에 완력으로 차에 태웠고 시동을 넣으며 이미 숨이 차고 진이 빠졌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 드러눕고 싶건만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장하다!) 주차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어떤 코스로 갈까?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리드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고망이(고삐 풀린 망아지)의 손을 잡고 그냥 끌려다니는 것이 우리의 산책. 개를 키워본 일 없으나 마치 큰 개를 산책시키는 것처럼 그렇다. 가끔 차나 탈것이 다가온다든지 경로를 너무 이탈하는 수준의 제재만 가한다. 목줄을 끌어 당기듯 손이나 외투 뒷덜미를 잡아 끄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오래도록 귀가할 생각이 없는 게 특징이다. 자유롭게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으니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매번 또 혀를 내두르게 된다.(이것이 종목이라면 상위 5% 안에 들 거라고 단언한다) 


하여간 그날은 걸어서는 잘 가지 않던 급경사 언덕길을 선택해 룰루랄라 부지런히 걸었다. 다행히 산책하기도 괜찮은 날씨였다. 하지만 넋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리드는 녀석이 하지만 코스를 짜는 건 나여야 하니까. 그래야 무사히,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귀가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언덕을 넘어와 녀석이 좋아하는 스팟(건널목이나 다이소 등 상점)에 머물 때즘 나는 코스 정리를 마쳤다. 길만 건너면 나오는 시어머니댁을 목표지점으로 잡은 거다.


"우리 할머니댁 갈까?"

귀에 대고 그렇고 언지를 주었더니 좋다며 거침없이 그쪽으로 향한다. 집이랑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오, 할머니를 좋아라하니 싫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심 그곳을 베이스캠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서로를 반가워 하는 사이 뒤로 살짝 빠져 좀 쉬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계획은 실패였다. 할머니는 출타 중이었고 별볼일 없다는 듯 고망이는 도로 신발을 신고 나가자고 나를 끌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실망은 길게 할수록 더 지치고 체념은 빠른 게 좋다.

다음으로 간 곳은 할머니 댁 코스의 단골, 교회 놀이터다. 할머니댁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실내놀이터를 말하는데 은혜롭게도 모든 아이들에게 열어 놓고 있어 시간대만 맞으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역시나 고망이는 당연하다는 듯 그곳으로 달려갔다.


트램펄린과 매트로 된 계단, 작은 터널과 미끄럼틀로 구성된 단순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겐 신나는 곳이고 또래가 있으면 좀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곳이다. 마침 동갑내기 친구들이 열정적으로 놀고 있어서 고망이 역시 땀을 흘리며 뛰어 놀았다. 그곳을 나와 교회 건물 탐방까지 마친 녀석이 약간 피곤했는지 2차로 들리는 실외 놀이터에 가겠다는 소리를 않는다. 나는 이때다 싶어 집쪽으로 아이를 슬몃 끌었다. 군말없이 가긴하는데 대로변에서 주저 앉으려 들었다. 목 좀 축일 때가 왔다 싶어 길 건너 까페에 들리기로 했다.

"이디야, 이디야." 몇번 가본 곳이라고 알은 채 하며 들어가서는 곧장 자리를 잡고 앉는다. 매장 안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건 많이 봤지만 저렇게 어른처럼 자리를 잡고 앉는 걸 보니 신기했다. 역시 절실한 마음 한 스푼 있으면 자발적으로 저런 행동이 나오는 거다. 곧 저녁 먹을 시간이지만 당 충전이 필요하겠다 싶어(사실 내가) 주스에 크로플도 한조각 시켜 나눠먹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을 떠올려 화이팅을 외치며 나오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고망군, 눈 앞에 포착된 한 식당으로 달려가는게 아닌가. 그곳은 평소 우리 가족이 즐겨찾는 고깃집이었다. 잠깐만.. 그래도 방금까지 간식 먹고 나왔잖아?

"고기 먹을래요, 배고파요~"

원하는 걸 다 들어줄 순 없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강력한' 주장이 있는 아기지만 그래도 잦은 제한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밥 먹겠다는 걸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난. 그리고 너무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그래, 외식한다는 결정까지 니가 내리는구나. 우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여 술 한잔도 곁들이는 어른의 시간, 어른들만 가득한 식당에서 결국 고기까지 야무지게 구워먹고 그 동네를 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제법 어둑어둑했다. 오늘의 코스는 3시간 반짜리... 역대 최장 코스가 아닌가 한다. 코피 터질 것 같은 기분인데 그것을 알리 없는 아이는 간간히 안아 달라 보채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평화롭게 집으로만 가면 되는 길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무엇일까. 아이의 작은 손이 새삼, 참 보드랍고 연약하다고 느낀다. 밤 바람이 한층 포근해졌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오늘도 나이든 육아 노동자의 고된 하루였습니다가 아니라 지치긴 해도 행복한 데이트였다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이 살짝 아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먼훗날 이 순간이, 너의 촉감이 얼마나 그리울까 생각하면.  








작가의 이전글 생존 운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