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니면 뭔데
같이 있으면 행복한 것도, 귀찮게 깐 새우를 먼저 입에 넣어주는 것도
드디어,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여름 동안 고망이는 크게 성장한 듯하다. 키는 물론 체격도 커지고 힘도 세졌다. 무거운 것을 들어 힘자랑을 하고 어른들을 종종 넘어뜨리고는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까치발을 하면 출입구 비밀번호도, 어린이집 초인종도 누를 수 있었다. 여름 내내 그걸 하고 싶은데 안 돼서 10번쯤은 자지러지게 울었을 것이다.
며칠 전 저녁엔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보드게임을 했다. 고망이가 무조건 이기도록 연기하는 가짜 게임이 아닌 모두가 즐기는 '진짜' 게임 말이다. 주문 카드에 따라 쿠키 박스를 빨리 만드는 게임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본인이 1등 하지 못하는 상황은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싫어 아예 우리를 게임에 끼워주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본인이 꼴등이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승복하고 본인이 1등일 때는 2등 한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기뻐했다. 심지어 꼴등한 사람을 응원하기까지.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우리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고망이에게 첫사랑이 생긴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고망이가 좋아하는 친구 옆자리에만 앉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마음에 드는 친구, 같이 어울리고 싶은 친구가 있나 보다 하고 말았다. 모두 작년부터 함께한 익숙한 친구들이었지만 고망이는 또래에 대한 관심이 늦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옆자리를 '너무' 사수하는 통해 친구들을 불편하게 해 선생님께 저지당하는 상황이 자꾸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친구 이야기를 꺼내었는데, 세상에 배시시 웃는 게 아닌가. 그 후로는 점입가경, 하원할 때마다 "고망이는 **가 좋은가봐요." "**가 너무너무 좋아요."라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선생님이 적당히 저지를 하다가 지난 금요일에는 프리패스를 주었던 모양이다. 친구 불편하지 않는 선에서 같이 앉고 놀라고. 그랬더니 나름 그 선을 지켜서 행동하고 그 친구도 응해주었는지 하원하자마자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평소 그렇게 물어도 무관심하거나 기억이 안 난다는 듯 힘들어하던 그 이야기를 아주 자발적으로, 술술 들려주었다.
"오늘 **랑 같이 낮잠도 자고 책도 읽었어요. 티니핑 퍼즐 맞추고 폴리 퍼즐도 했어요. 행복했어요."
또 배시시 웃으며 '행복'까지 들먹이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옆에서 할머니가 그 모습이 귀여워 괜히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뭐가 좋아?"라고 장난을 치자 대뜸 단호한 얼굴로 말한다.
"예뻐요!"
허이고, 이 말에 만화처럼 이마를 쳤다. 엄마보다 더 좋아? 할머니가 기어이 그 질문까지 해버리지만 별 고민도 없다. 바로 "더 좋아요." 해버리는 이 배신자 녀석. 내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냐.
아직 만 3세, 다섯 살. 성별 구분도 못하는 꼬마지만 같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 생겼다. 내 경우엔 어땠을까.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돼서야 그런 감정이 싹텄던 것 같은데.
야식으로 시아버지가 보내주신 차새우를 구워 와인이랑 마시며 J와 고망이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그러다가 TV를 보는데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가 방영되고 있었다. 신혜선 배우를 보며 J가 대뜸 "예쁘네. 미인이야." 이러길래 새우 머리를 따며 물었다. "나는?"
"자기는 좀더 상위 레벨. 고혹적이란 말이 어울리지."
방금까지 손님들을 위해 열심히 새우 껍질을 까던 J는 고혹적인 부인을 위해서는 더 이상 손을 놀리지 않고 세치 혀만 나불댄다. 그래도 나는 새우의 껍질을 마저 잘 까서는 J의 입에 넣어준다. 마, 이게 사랑이다. 고망아 사랑은 엄마한테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