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1부터 100까지 틀어주세요."
눈을 떠 쉬도 하고 아빠랑 굿모닝 꽁냥꽁냥을 한 고망이가 나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1부터 100까지 카운트하는, 미국에서 만든 유아용 수세기 영상을 틀어달라는 소리다. 올 한 해 동안 고망이가 가장 사랑한 영상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한 백 번은 봤음직하다. 등원 전에는 영상을 안 보여준다는 방침에 따라 소리만 들려주는데 그것도 좋단다. 카운트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숫자 블록과 매치하는 놀이(?)를 한다. 이걸 끝내야 세수도 하고 밥도 먹는단다. 한 몇 달간은 안 했는데 또 생각났던 모양이다.
고망이의 수 사랑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시작은 아마도 돌 때쯤. 달래기 힘들 정도로 거세게 울 때마다 시계를 보라 이르고 숫자를 하나 둘 셋 세었는데 그것이 의외로 먹혀들었다. 아마 그때부터 수의 매력에 빠져든 게 아닌가 싶다.
급속도로 숫자를 익혔는데 1에서 10보다 그 이후 숫자가 더 빨랐던 것 같다. 서른, 마흔, 쉰, 예순, 일흔 같은 아이에겐 다소 어려운 세기도 금세 읊어댔다. 저 영상을 본 후에는 심지어 영어로도 익혔다.
처음에는 수학 계열로 특출난 재능이 있는 건 아닌가 셀레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숫자나 문자를 좋아하고 그래서 그 부분에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폐스펙트럼의 특징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게 없어 걱정인 경우는 들어봤어도 또렷이 좋아하는 게 문제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쉽게 말해 숫자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숫자, 문자만 들여다 보고 있으니 사람, 특히 또래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소통 경험도 감소된다는 것. 그래서 당장 집에 있는 숫자 교구나 장난감들을 치워버리는 사람들도 봤다. 나도 한동안은 숨겨두기도 하고 관련 영상이나 책은 안 보여주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웃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
선생님들은 '확장'이 중요하단다. 숫자를 미끼(?)로 다른 놀이에 대한 흥미를 높여보란다. 숫자 모양 클레이 만들기로 클레이 놀이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든지, 계산대 놀이로 자연스럽게 역할 놀이를 즐기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제안해보고는 있으나 쉽지는 않다. 관심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육아의 모든 영역이 그렇지만 특히나 어렵고 좌절감을 많이 맛보는 것이 이 '놀이'다. 역할놀이가 좋다 해서 유도를 해보지만 고망이는 곧잘 심드렁한 얼굴이다. 하긴 나 스스로도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으니 그 심드렁함을 깨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면 그런다. 1부터 100이나 틀어달라고. 아쒸, 또?
2년째 숫자 사랑. 행복회로를 돌려보기로 한다. 본성이 예민한 녀석이다. 감각적으로 낯설고 어색하고 꺼려지는 것이 많다. 갑자기 불안감이 올라오고 불편해지기도 한다. 그것을 달래주는 것이 숫자다. 어찌 보면 고마운 존재다. 마냥 울어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놀이 확장은 어렵지만 훈육에는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세수나 목욕하러 가기 싫다 떼쓸 때는 타이머를 보여주며 몇 분 후에는 해보자고 한다. 미디어 보기를 제한할 때도 뭔가를 기다릴 때도 타이머를 보여주며 약속한다. 그러면 숫자를 세고 확인하며 스스로 마음을 조절해나갈 수 있어 말로 타이르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이다.
병원에서도 숫자가 나오는 책을 보면 대기 시간을 잘 견뎠고, 부동산에서 계약할 일이 있었을 때도 카운팅 놀이를 하며 잘 기다렸다.
헬로 카봇, 티니핑도 아니고 숫자 아는 척해봐야 또래 친구들과 공감대 형성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놀이를 전혀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 보드게임, 술래 잡기도 좋아한다. 아이스크림, 카페 놀이도 (짧게나마) 좀 하지. 하지만 하원 길에 뭐가 제일 재미있었냐고 물을 때마다 "숫자놀이"라고 하면 힘이 좀 빠지긴 한다.
"고망아, 세상엔 정말 재미있고 맛있고 즐거운 것들이 많단다. 마음을 열고 그것들을 경험해보자. 그렇다고 숫자가 어디로 가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형아가 되면... 질리도록 만나게 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