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망이가 실은 크리스마스 베이비다. 그래서 한 타임, 하루치 장사가 아쉬운 소상공인 입장에,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만은 업장 특별 휴무로 정했다. 생일만이라도 부모가 무조건 함께 있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 주에 J가 도쿄 출장이 필요한 상황이라 전격적으로 함께 도쿄에서 생일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우리 부부만 생각하자면 너무 매력적인 여행지지만 '네 돌짜리와'를 붙여보면 대도시, 최소한 료칸 같은 리조트가 있는 곳도 아니고 쌩 도심이라니 결코 자발적으로 정할리 없는 여행지였다. 하지만 같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타국에서 맞는 낯선 하루가 어쩌면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뾰로롱 생겨났다. 내 여행은 늘 그런 설렘 어린 상상으로 추진되어 왔고.
결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대단히 성공적이라 자평하며 혹시 유아 데리고 도쿄 가봐도 될까 고민했던 분들께 일말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써본다. 렛츠기릿.
1. 기대치를 바닥까지 낮추자
아직 유아라는 것을 기억하자. 당연히, 무조건 힘든 여행이 될 것이다. 어찌어찌 제시간에 공항 도착. 드 넓은 공항에서 우리 비행기 창구 찾아 위탁 수화물 맡기고 출국장을 통과하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릴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린아이가 각종 대기 줄에서 이탈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J 형 인간이라면 이 절차들이 반으로 줄어들긴 할 것이다. 모바일로 체크인을 해두고 환전도 로밍도 미리 해두면 말이다. (여기서 하나, 모바일로 체크인해 받은 탑승권도 미리 캡처해두면 이 진행 과정이 또 줄어듦을 강조한다)
낯선 곳에서 밥인들 잘 먹을까. 한 끼도 제대로 안 먹을 수 있다. 기껏 예약해 갔는데 재미없다고 발버둥 칠 수 있고 이제 막 왔는데 집에 가자고 할지도 모른다. 좀 더 걸어야 하는데 못 가겠다고 주저앉고 여기가 지옥이다 싶게 안고 또 안아야 될지도. 폭망을 염두에 두고 가는 거다. 단 1시간, 30분이라도 즐거울 일이 있기만을 바라면서.
2.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
우리는 어차피 주어진 시간이 1박 2일이었다. 그렇게 짧게 왜 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즉흥적이고, 코스를 미리 짜두는 일이 없고 알찬 관광에 관심 없는 P인간들은 여행 일정이 짧은 게 좋다. 그것도 '네 돌 아이와'이기에 1박 2일은 딱 좋은 일정이었다. 대신 나름대로 첫날 오전에 OUT 다음날 밤 IN으로 잡았는데 둘째 날 고망이의 컨디션이 저조해서 충분한 시간이었다.
3. 이동 수단 도움을 받아야
기대치를 낮춘 생각을 하다보니 지옥의 순례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동 수단이 필요했다. 공항에서 차를 렌트해 대중교통을 일절 이용하지 않고 이동한 것이다. 물론 소형차임에도 20만 원이 넘게 들었고, 트래픽잼에 걸려 하염없이 도로에 있는 순간도 있었고 가는 곳마다 주차비가 들기도 했지만(심지어 호텔에서도) 서로 고생하는 일 없이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유모차는... 가져가면 좋은 게 아니라 필수다. 드 넓은 공항, 몰, 호텔 라운지, 순간순간 졸려할 때 이 유모차가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다. 유모차는 기내 입구까지 가져가서 맡기는 서비스도 있으니 적극 이용하자.
4.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
숙소는 오다이바로 잡은 상태였다. 오다이바는 부산으로 따지자면 해운대 신시가지 느낌이다. 바다를 인접하고 있고 커다란 몰과 유락시설이 있다. 도쿄에서 어린아이와 시간을 보낼 만한 장소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디즈니 랜드도 가깝고) 처음에는 짧은 일정 더 돌아다닐 생각 없이 이곳에서 모든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기 기운도 있는 상태니 바닷가나 야외 공원을 다닐 수도 없고 그럼 실내 키즈카페류에 가는 것이 다일텐데 그건 서울이나 다름없잖아.'
그래서 또 폭망을 각오하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도 관심 있는 장소를 생각했다. 도쿄 하면 긴자. 일단 긴자다. 우리만 생각하면 긴자 미식 순방이지만 아이가 좀 즐거우려면 액티비티가 필요하다. 일본 여행 카페를 뒤지던 중 발견한 사진. 긴자 식스라는 중심가에 있는 몰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미드타운에서도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고 들었지만 좀 덜 알려진 곳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고망이에게 스케이트 타는 사진을 슬쩍 보여주며 물었더니 오, 흔쾌히 좋단다. 뽀로로 친구들 중 에디가 스케이트를 멋들어지게 탔던 게 생각난 것일까. 그래도 그 상황에 당도했을 때 컨디션에 따라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라 긴장했는데 실제로도 정말 흥미를 느끼며 즐겁게 탔다. 밥도 제대로 안 먹고(몰에서 먹은 늦은 점심은 대 실패) 컨디션이 좋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넘어져서 왕왕 울고 짜증 내면서도 2시간을 다 채워서 열심히 탔다. 마지막에는 에디처럼 한 발을 뒤로 드는 여유까지 보여서 우리가 동시에 빵 터지기도 했고, 천운으로 포근한 날씨에 멋진 석양을 뒤로한 채 내가 가장 염원하던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다.
이후엔 이미 여한이 없었지만 또 한가지 도전을 감행했다. 사실 내가 해외에 가서 꼭 들리는 곳이 있다면 바로 '재즈클럽'이다. 재즈클럽은 큰 도시라면 보통 있고 내가 주로 찾는 작은 클럽은 별도의 예약이 필요 없으면서도 뭔가 먹고 마시면서 코앞에서 라이브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다. 언어는 안 통해도 음악은 통하잖아?
긴자식스에서 10분 내 거리에 있던 곳을 하나 물색해서 먼저 분위기를 살펴봤다. 다행히 노 키즈 존이 아니었고 시끄럽게 굴지만 않는다면 오라고 했다. 그렇다면 고망이의 상태는? 졸리고 감기 기운이 심해진 상태. 치열한 고민 끝에 입장해서 체험이라도 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들어가면 거의 잘 것 같았고 불편해하면 바로 나가지 뭐, 했던 것이다. 할까 말까 할 때는 그냥 하자가 J와 나의 지론이었다.
결과는 의외로 대성공. 그날 잡혀 있던 색소폰과 어쿠스틱 기타의 조촐한 2인조 연주도 너무 좋았고 고망이도 자다 깨다 하면서 연주를 잘 감상해주었다. 심지어 멋들어진 솔로 연주 후에는 감기던 눈을 뜨며 기꺼이 박수로 화답했다. 이후에도 연주 보러 간 것이 너무 좋다고까지 해주었다. 고망이와 공연을 보러가는 꿈이 이렇게 빨리 실현되다닛. 여행은 역시 마법 같은 데가 있다.
꿈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숙소로 가니 시간이 이미 늦어서 마트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모두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고망이는 이른 아침부터 열이 나 다음 날 일정은 거의 생략한 채 차에만 있다가 공항으로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아주 허둥지둥하며 간신히 귀국했지만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이상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라도 갈 수 있겠고 다음번에는 여유만만할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이것이 잊고 있던 여행 중독 현상이다.
하지만 고망이는 심한 감기로 5일간 칩거에 들어갔다. 다행히 독감이나 폐렴까지 가진 않았지만 그랬다면 이 글은 못썼겠지.
고망아, 고마워. 태어나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