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1
지난주는 어린이집 엄마들과 동네에 새로 생긴 '분좋카(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3월부터는 6,7세 통합반으로 올라가서 올망졸망한 우리 친구들이 열심히 적응 중인 상황. 유치원으로 빠진 친구가 또 하나 나왔다는 이야기며, 요즘 아이들이 너무 줄어서 근처 가정 어린이집은 문을 닫을 위기고 초등학교도 몇 반 없다는 이야기 그리고 첫째가 있는 엄마들은 학원 스케줄 이야기로 바빴다.
"미술 학원을 다닌다고 했다가 만다고 했다가 골치 아프네."
"영어 학원은 진짜 배짱 영업이라니까. 부르는 게 값인데 안 보낼 수도 없고."
안 보낼 수 없어서 보내는 현실. 나는 입을 꾹 닫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차로 20분 정도만 가면 7세 고시라는 말이 나오는 동네라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유아들이 영어 시험에 매달리고, 학교도 아닌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치고 또 다른 준비 학원(?)을 다닌다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풍경은 아닌데 그 동네 사람들 이야기겠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여파는 넓게 퍼진다. 벌써 내 귀에도 6세가 되었으니 학습 안 시키냐는 말이 들려온다. 한국어 소통도 완벽하지 않은 아이를 두고 영어는 어떻게 할 거냐고도 그런다. 일반 어린이집, 유치원은 원생이 부족해 난리인데 영어유치원은 호황이다. 영유를 다니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쩐지 자부심으로 빛난다. 자식 교육에 부지런을 떠는 것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고 자랑이니 말이다.
반대로, 안 시키고 있는 부모들의 눈은 이리저리 돌아가며 불안에 떤다.
남들은 일찌감치 다 시키고 있어. 빨리 안 시키면 혼자만 뒤쳐져. 명문대는커녕 in서울도 힘들어. 취직도 못하고 빌빌대면 어쩔 거야. 그 불안 스위치를 자꾸 눌러대는 악의 마수는 어디에나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뭐 그럭저럭 들어주겠는데 제일 화나는 건 이거다.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데 부모가 방치하고 있다는 말. 옆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절해야 한다. 자기가 돈은 돈대로 들이면서 싫다는 애와 전쟁을 치르며 고생하고 있다 보니, 혼자 죽을 수 없다는 심보로 저러는 게 분명하다. 전문가들 모두가 학업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되는 시기라고 그렇게 말리는데 자기가 왜 발달 전문가인척 하는 건지 모르겠다.
최근에 J도 어디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영유 다니면서 부모랑 영어로 솰라솰라 소통하는 또래 아기라도 본 건지 불쑥 이렇게 물었다.
"왜 영어유치원 보내볼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는 방법 같은데 그리고 고망이는 관심도 많은데......"
모르는 소리 하네. 고망이의 발달적 특성 중 하나는 '인지 불균형'이다. 사람들, 특히 또래들과 소통하는 상황에서 대처하는 인지는 부족하고 명확한 정보에 대한 인지는 뛰어나다. 숫자만큼 문자에도 흥미를 잘 느끼고 흥미를 느끼면 잘 흡수한다. 어린이집에서 하는 한글 워크북을 시꺼메지도록 쓰더니 어느새 글을 읽었고 ABC 영어 동요 몇 번 보더니 알파벳 소문자까지 익히고 아빠 핸드폰에 있던 일어공부 앱을 자꾸 켜보더니 입욕제에 써진 히라가나도 알아본다.
요즘 언어 공부하는 유아용 태블릿 같은 것이 있던데 그거 쥐어주면 내가 없는 저녁나절 그걸로 공부하며 할머니 말 잘 듣고 있을 것 같다. 공부도 시키고 TV는 덜 보게 하고 떼쓰는 일도 없게 만들 수 있으니 유혹이 강한데 육아에 편법은 없다고 고망이에게 큰 해로 돌아올 거라는 걸 생각한다.
고망이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건 알아서도 잘하는 그것을 더 키워주는 게 아니라 나이에 비해 부족한 '그것을' 최대한 채워주는 일이다. 친구와 티키타카가 영어 공부 못지 않게 재미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모국어로 소통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 영어로도 소통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질 때 그때 공부를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확고한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사실 영어 조기 교육의 실패자다. 당시 엄마가 조금 일찍이 영어 사교육을 시키고 영어 회화를 경험하게 해줬는데 그것이 꽤 적절했는지 중학교 때까지 영어가 너무 재미있었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외고에 진학해 상당수 친구들이 해외 살이 경험이 있고 실력이 뛰어나다보니 자꾸 주눅이 들었고 거기다 수능 영어는 소통의 즐거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 영어에 대한 흥미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수십 년 후,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엄마들과의 영어 동아리 모임을 통해 다시 영어에 대한 흥미를 되찾고 있다. 정말 영어로 더듬더듬 수다를 떠는 것뿐인데 그 자체가 너무 즐겁다.
상대의 이야기를 최대한 경청해 이해하고 내 생각을 최대한 자연스러운 영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법이나 어휘를 익힌다. 나는 새삼 영어 교육도 이런 방식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어휘와 문법을 달달달 외워 글을 해석해내는 것이 중요한 수능영어가 버티고 있는 이상 그것은 힘들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즐겁게 영어로 떠들더라도 그 이후까지 자발적으로 영어를 즐겁게 공부하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영어를 주입시키려고 난리일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한정된 자금을 거기다 부을 이유가 있나. 누구 좋자고??
왜 외국어 습득을 장려하려는가? 바로 기회를 넓혀주고 싶어서다. 일의 분야, 직종, 환경 등등. 좁디좁은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으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세계를 무대로 나서는 게 쉽고 더 즐거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큰 목표를 생각해보면 수능영어는 걸림돌이다. 생각은 더 격해진다. 대학 꼭 잘 가야 돼? 아니 애초에 대학이란 데는 꼭 가야 돼? 서울대 법대 나와 모두가 선망하는 그 엘리트 코스를 거친 자가 지금 뭐가 되었더라? 소위 말하는 공부 머리와 지성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뼛속까지 깨닫는 요즘이다.
"......그러니까 영어유치원은 됐다는 거야. 우리나라 말로 즐겁게 대화 잘하는 게 최우선이야."
입을 삐죽거리는 J에게 다 계획이 있다면서 그렇게 말했다.(사실 계획은 세우는 중) 그렇다고 영어 차단은 아니다. 괜히 놀아주면서 영어를 섞어서 말하고 영문 그림책을 가지고 오면 적극적으로 읽어주기도 한다. 고망이를 열심히 지켜보다 보면 그에 맞는 방식도 찾을 수 있겠지.
다른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만 집중하자, 고망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