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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보석함 속 러브스토리1

by 펑예

비가 많이 오는 밤, 첫눈이 온 날, 술 한잔이 생각나는 날... 하여간 감성이 몽글몽글해지는 날이면 괜찮은 사랑 이야기 하나 보고 싶어 OTT를 뒤져본다. 그런데 재생한 지 30분도 채 안 돼 꺼버리기 일쑤다.

"또 저렇게 만난다고 말이 돼? 리얼리티가 없네."

"우~ 클리셰. 아직도 저런 만남이 통하나?"


나보다 너그러운 J는 내가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난리지만 나는 내 맘을 촉촉하게 해줄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찾고 싶을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내 보석함에 있는 러브스토리를 소개해보겠다.


1. 와니와 준하(2001년 작)


추억의 영화관 정동스타식스에서 밤에 영화 세편씩 릴레이로 상영하던 때가 있었다. 새벽까지 영화 보는 걸 낭만으로 알던 시절, 패키지로 묶인 영화 중 제일 기대 없던 작품이었는데 웬걸, 제일 몰입해봤다. 특히 통통 튀는 연기의 일인자인 김희선이 힘 쫙 빼고 화장기 하나 없이 나오는데 지금껏 본 연기 중 가장 좋았다.

이야기는 와니와 준하가 와니의 부모님이 살던 옛집에서 동거를 시작하면서 벌어진다.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와니의 과거로 들어가는 일이 되고 와니의 마음 저 편, 해결되지 못한 상처와 만나는 일이 된다. 상대역은 주진모. 와니를 '아주 운명적으로' 소개팅에서 만났다고 너스레를 떠는 와니 바라기인 준하로 나온다. 조연들도 대단한데 무려 조승우와 최강희가 아주 풋풋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보통 마음이 끌리는 이야기는 그 BGM도 훌륭한데 조지 시어링이 클래식한 스타일로 편곡한 "My favorite things", 리사 오노의 "I wish you love" 등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 들어도 주옥같다.

와니와준하OST



2. 러브레터(1995년 작)


"오겡끼데쓰까?"를 유행어로 만든 일본영화 최고 흥행작. 영화를 가장 좋아했던 고등학생 시절엔 일본 영화가 정식 수입되지 않던 시기라 어찌어찌 알게 된 비정식 경로로 작품들을 접하곤 했다. 보수동 뒷골목(필자는 부산 출신) 같은 데서 에반게리온 비디오를 구해다 봤고 부산대학교 영화 동아리 상영회에 가면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는 거의 왕가위급으로 충격이 컸고 곧장 매료되었는데 그중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가 이 '러브레터'였다.

눈이 잔뜩 오는 홋카이도랑 일본의 옛 가옥도 그렇고 남자 주인공이 죽은 상태로 시작하는 설정도 너무 흥미로웠다. 꼭 닮은 인물과 같은 이름, 반전 등 추리소설의 요소도 많다. 그리고 시종일관 노을빛 자연광에서 찍은 듯한 회상씬들(그런데 그게 일본 원본판 색감과 다르다고;). 요즘 말로 분위기가 미춌다.

음악은 슌지 영화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레메디오스의 곡들로 피아노와 현악이 어우러진 뉴에이지 연주곡들로 가득하다.

로맨스의 백미는 개인적으로 '애틋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감정을 영화로 표현한 듯하다. 눈 오면 생각나는, 사케 한잔 하면서 보고 싶어지는 작품.

러브레터-윈터스토리



3. 먼 훗날, 우리(2018년 작)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이다. 라디오에서 한 영화 평론가가 '추천해서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사랑 이야기'라기에 귀가 쫑긋 커져 찾아봤다. 스토리 소개에 앞서서, "강력 추천하는 러브스토리를 가지고 왔다"며 호들갑 떠는 내 말에 호들갑을 떨수록 믿지 못하겠다는 듯 심드렁하게 한 손으로 숏폼을 보던 J가 이내 손놀림을 멈췄고 마지막엔 나보다 먼저 펑펑 울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중국영화 그것도 러브스토리는 개인적으로 좀 생소했고 주인공으로 나오는 중화권 여신 주동우도 낯설었다. 러브스토리 여주인 데다 중화권 여신이라는데 외모는 어째 평범하고 체구도 작아서 갸우뚱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역시, 이 모든 것을 커버하는 연기력이 있었다. 중국의 김고은이랄까? 이후 그의 주요 출연작들을 몇 편 봤는데 중국영화 믿보배로 인정.

베이징에 사는 청년들이 설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연히 합석하여 시간을 함께 보내는 샤오샤오와 젠칭은 고향과 베이징을 오가며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우리도 공감하는 바처럼 베이징이라는 대도시에서 발 붙이고 꿈을 키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둘은 헤어지고 수년이 흘러 비행기에서 조우한다.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비행기는 갑작스런 폭설로 운항이 막히고 그들은 공항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그렇다고 불장난을 하는 건 아니고 그냥 회포를 풀 뿐이니 오해 마시길.)

"네가 그때 용기를 냈다면 난 너랑 평생 함께 했을 텐데."

그 밤 둘은 아직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마음과 그렇다고 다시 만날 수도 없는 현실을 마주한다.

과거 그들이 함께하는 장면은 컬러지만 현재의 이 장면은 흑백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 사랑을 잃은 후 세상이 잿빛으로 변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한결같이 그들이 함께 오길 기다리고 있던 젠칭의 아버지가 점점 쓸쓸히 늙어가는 모습도 애틋함을 폭발시킨다. 마치 그들의 사랑이 시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곡인 천이쉰의 "우리"도 명곡 중 명곡. 휴지 어딨어?ㅠ

천이쉰의우리


OST를 들으며 이 글을 쓰다 보니 각각의 명장면들이 아른거리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여운이 커선지 더 이어가기가 힘드네? 다음 주에 계속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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