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계로 바라보는 인간다움의 시작
“당면의 과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수잔 손택 (Susan Sontag)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에서
우리나라의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이 ‘작별하지 않는다’로 이번 2026년 3월 26일 미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소설부문을 수상했다.
수잔 손택 또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비평부문에서 1977년에 수상한 적이 있다.
또한 지난 2003년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수잔 손택에게 평화상을 수여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시상 이유였다.
우리는 지금 혼란과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지도자가 윤리적인 책임을 멀리한 채 자국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과시하며 MAGA캡을 쓰고 종주먹을 흔들어대고 있다.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관세(關稅)를 가지고 전 세계를 겁박하고 매스컴을 뒤흔들어 놓더니 이웃한 국가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자국의 교정 시설에 강제 구금 시키는 일까지 자행하였다.
여기에 힘입어 드디어 중동의 한나라를 타깃으로 하여 무차별로 미사일을 퍼붓고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잔혹하게 코너로 몰아넣고 운신이 불가능하도록 옥죄고 있는 작지만 부자인 어떤 나라의 지도자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신나게 엄청 비싼 미사일을 날리고 있다. 중동의 한나라의 지도자와 지도부를 집단적으로 암살 처리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차기 지도자는 또다시 처형하겠다고 당당히 협박을 하고 있다.
도저히 상식과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 작금의 세계정세에 대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맹국들은 아무런 논평과 의견도 제출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못 본체 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정치와 종교에 관한 주제의 글은 적극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소심한 사람이다. 어찌 오늘의 주제를 잡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정치와 세계정세에 관한 글의 흐름이 이어졌다. 나와 정치관이 다른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을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민감한 부분은 덮어두려 한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출간한 출판사는 ‘오늘날 타인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가지고 다음처럼 출판사 서평을 하고 있다.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그리고 이렇듯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 손택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택은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던진다. 무엇보다 먼저 이 세계를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제 아무리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제스처가 엿보일지라도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방식 자체를 문제 삼아 보자고. 따라서, 자신이 예전에 ‘투명성 Transparency’이라고 불렀던('해석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손택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참담함 사이에 얼마나 크나큰 거리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았을 때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일까에 대해 소심하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급하게 하는 위로나 대단한 해결책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저 그 고통 앞에서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잠시 함께 서 있어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세상은 종종 너무 시끄럽고, 너무 빠르게 결론을 내리려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심 어린 침묵이, 조심스러운 공감의 눈빛이, 그리고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보다 ‘지금 많이 힘들겠구나’라고 말해주는 공감이 담긴 한마디가 더 깊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일은 결국 그 사람의 상처를 고치려 드는 일이 아니라,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공감(sympathy)’이란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다. 공감력이 없는 사람과의 동행은 재앙이다.
공감이란 단순히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타인을 하나의 수단이 아닌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는 인간다움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공감이 사라진 관계에서는 이해보다 계산이 앞서고, 배려보다 이익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 관계 속에서는 말이 오가도 마음은 만나지 못하고, 함께 걸어도 결국 각자의 고독 속을 걷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지능이나 화려한 언변 이전에, 타인의 아픔 앞에서 잠시 멈출 줄 아는 마음일 것이다. 공감이란 상대의 삶 속으로 무리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길이 놓인 자리에서 잠시 세상을 함께 바라보려는 조용한 노력이다. 바로 그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 곁에 머무를 진솔한 자격을 얻게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ansom Rogers)의 관점에서 공감은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개념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실현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이 개발해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 중 하나가 바로 공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공감하는 것은 세상을 자신의 눈에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공감이란 타인을 이해하려는 지적인 노력 이전에, 스스로의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타인의 마음속 의자에 조용히 앉아보는 배려와도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경험과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가지만, 공감하는 순간은 그 익숙한 기준을 잠시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사람이 왜 아파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삶의 사연이 한 편의 이야기처럼 조용히 마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진정한 공감이란 상대를 바꾸려는 태도가 아니라, 이해할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인내이며, 판단하기 전에 먼저 느끼려는 머리가 아닌 가슴의 깊은 예의인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있는 곳에서는 관계가 경쟁이 아니라 동행이 되고, 인생은 서로를 통과하는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서로를 덥혀주는 작은 모닥불 같은 시간이 되어 간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깨닫게 하여 현대의 성서라고 불리는 칼릴지브란(Kahlil Gibran)의 예언자(The Prophet)에 실려있는 ‘고통에 대하여(On Pain)’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Your pain is the breaking of the shell that encloses your understanding.
(너희들의 고통이란 너희를 둘러싼 깨달음의 껍질이 깨어지는 것이다.)
Even as the stone of the fruit must break, that its heart may stand in the sun, so must you know pain.
(그것은 아무리 단단한 과일의 씨앗이라 할지라도 씨앗들이 싹을 틔워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펼치려면 햇빛을 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과거라는 껍질을 깨야 하듯이 너희들은 그렇게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마음이 한 번 금이 가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금 간 마음을 함부로 두드리지 않게 된다.
진정한 공감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느껴본 삶 속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과 충분히 따뜻하게 동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집(我執)의 껍질을 깨라.
공감의 세계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함께하는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Monday, March 30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