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살아나간다.
행복이란 마음이 아름다워진 상태가 아니면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모를 때 사람은 불행하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소망과 욕망을 혼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욕망에 아름다움을 더하면 소망이 되고
소망에서 아름다움을 빼면 욕망이 된다.”
― 이외수 ‘벽오금학도’에서
‘욕망에 아름다움을 더하면 소망이 되고, 소망에서 아름다움을 빼면 욕망이 된다.’
이 말은 욕망과 소망을 가름하는 잣대가 결국 아름다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순한 외형의 미려함이 아니라, 타인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과 스스로를 넘어서는 절제, 그리고 보편적 평화와 안녕을 향해 나아가려는 내면의 자각을 의미한다. 욕망이 자신만을 위한 소유와 배려의 결핍 속에서 형성될 때, 그것은 쉽게 타락하며 내면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안에 아름다움이 깃들면, 욕망은 단순한 결핍의 표현을 넘어 의미를 향한 움직임으로 변화한다. 결국 소망이란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듬고 비추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 케슬러는 그의 책 ‘생이 끝나갈 때 준비해야 할 것들’에서 “희망은 여정이지 종착지가 아니다. 탐색하는 것에 희망의 의미가 있다. 희망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희망이라는 여정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희망이 하나의 도달점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여정이라면, 우리는 그 여정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는 내면의 빛을 만나야 한다. 그 빛은 거창한 성취나 완결된 결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을 살아내는 태도 속에서 조용히 스며든다. 때로는 길을 잃고 주저앉는 순간조차도 희망의 일부가 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다시 방향을 묻고, 다시 걸음을 떼며, 비로소 살아 있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결국 희망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견디고, 이해하며,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선택의 이름일 것이다.
‘행복이란 마음이 아름다워진 상태가 아니면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다’라고 했다. 행복이 마음이 아름다워진 상태가 아니면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라면, 결국 행복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와 방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이 흐트러지고 욕망에 잠식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도 공허해지지만, 마음이 맑고 조화로울 때에는 비록 결핍 속에 있을지라도 충만함을 경험한다. 이는 행복이 무엇을 가졌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행복에 이르기 위한 길은 세상을 바꾸는 데 있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다듬어 아름다움에 가까워지려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극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면 어쩔 수 없는 불치(不治)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은 행복에 이르는 게이트를 활짝 열어주기도 하는 양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양극성은 아름다움이 단순한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깊은 층위를 건드리는 힘임을 시사한다. 우리는 아름다움 앞에서 자신을 잃는 동시에, 오히려 더 깊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이 때로는 상처처럼 스며들어 우리를 흔들어 놓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가 아직 다다르지 못한 어떤 이상과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 인간은 삶을 더 섬세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결국 아름다움이 주는 고통과 기쁨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넓은 이해와 더 깊은 행복으로 이끄는 하나의 연속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의미를 함축하여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강조하여 그가 말한 아름다움은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형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에 가까울 것이다. 절망과 죄의식 속에서도 인간이 끝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까닭은, 어딘가에 여전히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일지 모른다. 그 아름다움은 때로는 용서의 형태로, 때로는 연민과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미약한 빛을 따라 어둠을 건너며, 비로소 서로를 구원하는 존재로 나아가게 된다.
마치 그의 저서 『죄와 벌』에서 살인을 저지른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 차가운 동토의 땅으로 유배를 떠나는 소냐의 모습처럼, 그 아름다움은 용서와 구원을 상징하며 끝내 서로를 지켜내는 힘으로 드러난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억지로 만들어지거나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타인의 짐을 함께 짊어지려는 아름다움의 동반 선택 속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죄를 짓고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그 곁에 머물며 함께 견디려는 존재가 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결국 아름다움이란 삶의 균열을 덮어버리는 장식이 아니라, 그 균열 속으로 스며들어 상처를 견디게 하고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조용한 힘인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데이비드 케슬러는 말한다. “삶의 목적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만큼이나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달렸다. 존재의 이유가 언제나 ‘내가 얼마나 생산적인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해변의 모래 한 알을 치우면 해변 전체가 변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중요하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우리 모두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말은 삶의 의미가 무엇을 이루었나 하는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있지 않음을 조용히 말해준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지만, 실은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파문처럼 세상에 스며들고 있다. 나의 존재가 세상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나의 소멸은 세상의 한 면이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곁에 머물러 주는 일, 타인에게 말없이 건네는 이해와 손길의 온기, 그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다. 결국 ‘나’라는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쌓아 올렸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며 타인과 세계를 마주 했는가에 의해 더욱 깊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글의 흐름을 마무리하기에 어울리는 시(詩)로는 메리 올리버의 「The Summer Day」를 떠올릴 수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지금까지 이어온 사유를 조용히 응축해 준다.
“Tell me, what is it you plan to do
with your one wild and precious life?”
“말해 보세요,
당신은 이 단 하나뿐인 거칠고도 소중한 삶으로 무엇을 하려 하나요?”
이 물음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되묻는다.
아름다움과 희망,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따라 이어온 사유의 끝에서, 결국 남는 것은 단 하나의 삶을 어떻게 마주하고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요한 결심일 것이다.
Tuesday, April 14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