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이 사랑한 시인
“여승(女僧)”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시인 윤동주가 가장 닮고 싶어 하고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한 사람,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한 당대의 모더니스트, 그는 ‘백석’이다.
그는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은 백기행이다.
그의 시집 ‘사슴’ (1936)에 실린 많은 시 가운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여우난골족> 등은 많은 사람이 현재까지도 사랑하며 기억하고 있다.
훤칠한 외모와 큰 키에 양복을 즐겨 입고 흰 셔츠에 근사한 넥타이를 한 당대의 모던보이, 그는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한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 그는 기생 김영한을 만나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김영한에게 백석은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고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을 보낸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자야(?)와의 사랑에서 현실을 초월한 이상, 사랑에 대한 의지, 그리고 소망을 담아 시를 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그러나 백석은 부모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한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게 되고 괴로워하다 자야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둘이 만주로 떠나 사랑의 자유를 찾자고 권하였으나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경성으로 발걸음을 한다.
백석은 만주로 가고 자야는 경성으로 가면서 둘은 그 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하여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훗날 자야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근대의 최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운영하는 큰 성공을 거둔다.
그녀는 “내 사랑 백석”이라는 자서전 형식의 책을 집필하여 거기에 이렇게 회고했다.
“단 한 번 부딪힌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훗날 자신이 일으켜 세운 요정 대원각을 무소유를 주창한 법정 스님에게 아무 대가 없이 시주해 ‘길상사’라는 아름다운 사찰이 탄생한다.
수천억에 해당하는 성북동의 비싸고 넓은 터를 무상으로 시주하는 김영한에게 기자들이 아깝지 않으냐고 묻는 질문에 그녀는 이 재산 모두는 백석의 시 한 줄에 미치지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한다.
나는 어느 흰 눈 내리는 겨울날에 길상사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법정 스님의 기념관 앞 마루에 앉아 가만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자야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생각하였다.
길상사의 뜨락과 흐르는 개울물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깊은 생각을 하고 돌아왔다.
백석의 시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詩)는 바로 “여승(女僧)”이다. 나이 들어 암송하기가 힘이 들지만 이 시만큼은 꼭 외우려 거듭해서 노력하고 있다. 1930년 대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타고난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면, 이 짧은 시 안에 한 많은 여인의 일대기를 담은 대하소설을 한 편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시에서 표현되는 ‘파리한 여인’은 그 자체로 빈약하고 가련한 느낌을 제공하는데 이 여인이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고 적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불쌍하고 나어린 딸아이를 때렸겠는가? 그 딸아이는 배가 고파 칭얼거렸을 수도 아니면 무엇인가를 사달라고 어미를 졸랐을 수도 있다. 그 어린 딸아이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어미는 자식을 때리며 얼마나 가슴이 아려 왔겠는가? 그 느낌을 시인 백석은 어미가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고 표현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일벌처럼 부지런한 지아비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러 타관으로 나간 지 십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하고, 어린 딸은 무슨 연유에서 인지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여 돌무덤에 묻힌다. 그 과정을 백석은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고 아름답고 서글프게 표현했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쓸쓸한 장소의 배경인 산절의 마당 귀퉁이에서, 음향적 외로움을 나타내는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에, 그 쓸쓸한 운명을 가진 여인이 어쩔 수 없이 스님이 되기 위하여 삭발을 하는 과정을 시인 백석은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고 시적(詩的)으로 최고의 감정적(感情的) 표현을 하고 있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이 구절은 시(詩)의 첫째 연에 나오지만 실제적인 시간적 순서로는 마지막 연에 해당한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여승에게서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는 구절은 후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속세를 벗어나서 번뇌의 고통을 버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는 구절은 머리를 깎은 늙고 연약한 여승의 지난날의 고난과 힘든 여정을 시인이 회상하며 안타까움을 담은 글이다.
마지막 행에서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불경(佛經)이 왜 서럽다고 시인 백석은 표현을 했을까? 를 생각해 본다. 불경 속에 담긴 그 많은 깊은 의미를 나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석은 여승의 그 한(恨) 많은 삶을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라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쓸쓸하고 가련한 여성(女性)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시(詩)로 백석의 ‘여승’을 첫손가락에 꼽으며, 비천하고 외로운 남성(男性)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시(詩)로는 서정주의 ‘자화상’을 첫손가락에 꼽는다. 다음에는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自畵像)에 대한 나의 느낌을 적어 보도록 하겠다.
Tuesday, October14 th.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