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

그 여자네 집

by James Kim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운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저주받은 삶이다.

우리네 일상사는 가만히 살아온 날을 더듬어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고 웃고 말하고 악수하고 차나 술을 마시고 또 곧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 사람과 전화 통화도 못하였으며 더욱이 만나지 못하고 그렇게 잊혀져 간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

어떤 사람은 지금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은 채로 어렴풋이 생각나는 존재로만 남아있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가끔 이름 정도는 생각나지만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기억에 남아있는 정도로 그치는 존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한번 보고 싶고 늘 그리운 얼굴로 남아있는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소중한 그러한 존재도 있다.

그런 사람이 마음속에 깊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그리운 사람이다.

그렇게 마음속에 그리운 사람이 많은 사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나의 추억 속에 아름다움과 같은 선물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만날 수는 없어도 소식이라도 듣고 싶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금 살아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어도 늘 마음속에서 봄날의 피어나는 여린 꽃처럼 아련히 그립다.

그래서 그리운 사람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풍부한 인생의 히스토리(history)를 가진 풍요로운 마음의 소유자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리운 사람은 꼭 다시 만나 해후하지 않더라도 그리움으로 그대로 남아만 있어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가끔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그 사람과의 옛일을 회상하며 입가에 짓는 미소만으로도 그 사람은 이미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이다.

자, 이제 시 한 편을 조용히 가슴속으로 느껴보면서 그리운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비 오는 겨울날 저녁,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모두 따뜻한 마음이 되었으면 한다.


Tuesday, December 16th.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