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걷는 길

매화는 은은한 봄의 향기를 담고....

by James Kim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지 못하고,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오래 걷지 못한다.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기가 옳다고 하는 사람은 빛나지 못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공을 차지하지 못하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짓은

음식물 쓰레기(餘食贅) 같은 행위다.

만물은 이런 것을 혐오한다.

그래서 도를 체득한 자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제24장’에서



어디선가 현실과 정세가 어려울 때는 도덕경을 읽으라 들은 적이 있었다. 봄이 왔건만 봄이 온 것 같지 않아 한 주간을 도덕경을 집중적으로 읽고 필사를 했다. 꽃처럼 아름다웠다 하는 중국의 미녀 왕소군이 말했듯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어제 아침 산책길에 아파트 양지바른 계단 옆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좁고 은밀한 공간에 수줍게 피어있는 매화를 서울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활짝 피지는 못하였으나 수줍게 피어나는 순백의 매화는 은은한 봄의 향기를 담고 아직은 찬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매화나무의 작은 떨림의 숨결 앞에서 나는 오래된 위로를 다시 배운다. 세상은 때로 거칠고, 마음은 자주 흔들리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절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제길을 걸어온다는 사실을. 아직 다 피지 못한 꽃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우리의 삶 또한 완전하지 않은 채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닫는다.

바람을 피해 숨어서 몰래 수줍게 피어나는 매화 몇 송이가 조용히 봄을 예고하듯, 우리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피어나며 서로의 계절이 되어간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계절은 순환하고 꽃은 피어나고 향기를 내뿜는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지쳐 멈춰 서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이유를 자연 속에서 조용히 배워나간다.

그러나 그 배움은 무엇을 더 쌓아 올리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덜어내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는 마음, 남보다 앞서려는 조급함, 스스로를 높이 세우려는 미세한 욕망들이 오히려 우리의 걸음을 어지럽힌다는 것을.


노자의 ‘도덕경’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으며,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공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높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마치 발끝으로 서 있는 사람이 오래 서 있을 수 없듯이, 억지로 자신을 세우려는 마음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불안한 균형에 불과하다.

자연은 스스로를 억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가장 충만하게 존재한다. 매화는 자신이 피었음을 소리 높여 알리지 않지만, 그 향기는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간다. 그처럼 우리의 삶도 굳이 증명하려 애쓰지 않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울림과 진실을 품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비워내며, 굳이 앞서려 하지 않는 겸손의 걸음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고, 말없이 머무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스며드는 향기가 있다. 그리고 그 고요한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나는 이제 조용히 나의 봄을 기다린다. 봄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기다려야 나의 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 있는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게 숨을 고를 시간마저도 봄을 향한 한 걸음이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더라도, 땅속에서 뿌리가 먼저 길을 내듯, 나 또한 조용히 나를 단단히 붙잡는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이 가장 깊이 나를 돌보는 숙고와 인내의 시간임을 조금씩 배워간다. 조급함이 잦아들고 마음이 잔잔해질수록, 멀리서 오는 계절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또렷해진다. 그 소리는 크지 않지만, 분명하게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어느 순간, 나는 알게 될 것이다. 봄은 바깥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부터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를 재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였던 시간들이 하나둘 봄의 꽃눈이 되어 있었음을.

그리고 마침내,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봄은 내가 기다려온 만큼의 온기와 향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속에서,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조용히 피어나 있을 것이다.

오늘 햇살이 따스하다.

이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봄 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그 길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같이 만나 조우하기를 바란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수고했노라고 말해주고, 미래의 나에게도 깊은 당부의 말을 하고 싶다.

나이 들어가는 나를 잘 부탁한다고.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럽게 스친다.

나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나란히 세워 함께 걸어간다.

그리고 가만히 속삭인다.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겠노라고.

이 길 위에서 만난 나 자신들을 끝내 잃지 않겠노라고.



Wednesday, March 4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