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잘 말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
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의 비결이다.”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낭만적 연예와 그 후의 일상’에서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주제로 대화가 흘러가더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고, 설령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펼칠 수 있는 내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은 조급함에 사로잡혀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기보다는, 끝까지 귀 기울여 들으며 대화를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시간 속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하나 놓이기 시작한다. 말은 입에서 나오지만, 이해와 교감은 마음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성의를 가지고 들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한 조각을 잠시 내 마음 안에 머물게 해주는 일과도 같다.
그래서 진정으로 잘 들어주는 사람 곁에서는 이상하게도 말하는 이의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굳어있던 생각들도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한다. 대화란 결국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조용히 밝혀 놓는 지혜의 등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등불 아래에서 사람의 마음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말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듯 조심스럽게 걸어 나오고, 서로 다른 생각들은 부딪히기보다는 나란히 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때, 말과 말 사이의 작은 침묵마저도 이해와 공감의 숨결로 채워진다.
어쩌면 인간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선물은 조언도 설득도 아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주는 깊은 경청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조용한 경청의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또 하나의 작은 등불이 켜져, 세상을 조금 더 환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어서 이렇게 말을 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늘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 안에도 한두 가지쯤은 다소 엉뚱하고 비이성적인 면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사람이란 본래 완벽하게 정돈된 이성의 존재라기보다, 때로는 서투르고 때로는 모순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란 논리로만 이어지는 길이 아니라, 서로의 어설픔과 불완전함을 조용히 끌어안으며 함께 걸어가는 작은 오솔길의 산책에 더 가깝다.
누군가의 말이 조금 어긋나도, 감정이 잠시 빗나가도, 우리는 그 틈을 지나치게 따지기보다 미소로 덮어 줄 수 있다. 그럴 때 관계는 논쟁의 승패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허술함을 이해해 주는 너그러움 속에서 조금씩 깊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오래 함께 걸어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는 완벽한 이성보다도, 서로의 작은 어리석음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따뜻한 여백인지도 모른다. 그 여백이 있을 때 비로소 관계는 숨을 쉬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는 잔잔한 믿음의 평화가 오래 머물게 된다.
마치 풍랑이 이는 호수에는 달빛이 머물지 못하고, 바람이 잔잔한 호수 위에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듯, 사람의 마음도 서두르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할 때 비로소 맑은 빛을 비춘다.
알랭 드 보통은 보충해서 다음처럼 설명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르친다는 개념은 건방지고 부적합하고 몹시 해롭게 느껴진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또는 그녀가 변화하기 바란다는 말은 꺼낼 수 없다.
낭만주의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진실한 사랑은 파트너의 존재를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그저 서로를 그대로 두는 방치의 이름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가드너가 꽃을 억지로 잡아당겨 키우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는 꽃에게 “더 빨리 피어라”하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햇살이 잘 뜨는 자리를 마련하고, 마른 흙에 물을 조금 건네며, 바람이 지나갈 길을 조용히 열어 둔다. 그러면 꽃은 스스로의 시간으로 천천히 아름답게 피어남과 같다.
사람 사이의 사랑도 이와 닮아 있다. 누군가를 바꾸려는 조급한 손길이 멈출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자신의 리듬으로 자라기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고치려 애쓰기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숨 쉬고 피어날 수 있는 넉넉한 자리를 마음속에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 곁에 머무는 다정한 침묵과 기다림 속에서, 사랑은 어느새 말없이 서로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부드러운 빛이 된다.
우리는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오랜 기간 학생들을 지도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툭하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려 하고, 틀린 부분이라고 생각되면 가르치려 드는 버릇이 있다.
아마 그것은 오랫동안 몸에 밴 역할의 흔적일 것이다. 오랜 세월 길을 설명하던 사람의 입에서는 어느 순간에도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먼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교실의 칠판과는 달라서, 틀린 부분을 지워 준다고 해서 곧바로 더 좋은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저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는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자신을 아껴주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자신을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은 사람에게 마구 소리를 치고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 아이가 무시하고 소리치며 보잘것없이 대하는 사람은 바로 그 아이를 가장 사랑하고 아낌없는 보살핌을 보내는 엄마나 할머니이다. 그 아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해도 그 사람이 자신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아이의 난폭하고 이율배반적인 행위는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틀어진 징표이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 행동이나 수줍은 표현은 모르는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 앞에서 할 수 있지만,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 줄 것임을 알고 있는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뿐일 것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역설을 생각하게 된다.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마음을 모두 풀어놓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만, 바로 그 친밀함 때문에 더 깊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어린아이는 온전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기에 마음을 거리낌 없이 자기 뜻대로 아무렇게나 쏟아내지만, 어른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한 번 더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성숙이란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상대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남길지 헤아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성숙한 사람의 사랑은 때로 조용한 절제의 형태를 지속해야 한다. 가까운 사이라 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고, 익숙한 사이라 하여 예의를 놓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작은 배려와 자제의 마음이 쌓여 갈 때, 관계는 단순한 친밀함을 넘어 오래도록 흔들리는 않는 신뢰의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마치 깊고 넓은 강물이 겉으로는 잔잔히 흐르지만 그 속에서는 단단한 흐름을 지니고 있듯이, 성숙한 사랑 또한 겉으로는 담담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존중과 책임의 물결이 중심을 잡고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예언자에 나오는 ‘사랑에 대하여’의 뒷부분을 여기에 적어본다.
사랑은 사랑 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사랑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당할 수도 없는 것,
사랑은 사랑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고요한 문장처럼,
서로를 지키는 사랑은
언제나 말보다 깊은 침묵 속에서 더 오래 빛나기 마련이다.
Friday, March 6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