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사는 게 부끄럽다. 존재하는 게 부끄러울 일은 아닌데 생각이 길어지다보면 결국 거기까지도 간다.
지난주 아이들과 짧은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일정 중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써야겠다고 마음 먹게 만든 것은 오늘 있었던 일이다.
부모님이 서울 병원에 가시는 데 새벽에 공항으로 모셔다 드리는 길이었다. 엄마가 쉽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했고 듣고 있기도 답답한 마음에 '나라면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싸서 내 돈 벌어쓰지 시댁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라면'이 왜 중요하지? 누가 나한테 '너라면'을 묻지 않았는데 나는 왜 '나라면'이라고 말을 했을까. 그가 가진 아주 단편적인 사실만 듣고 왜 '나라면'이라고 했을까. 나는 그가 아닌데 왜 그랬을까. 그가 나의 '나라면'을 들었다면 불쾌 내지는 상대적 열패감을 느꼈을 것 같다.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닌데 누가 묻지도 않은 '나라면'은 종종 그런 작용을 하게 될 것 같다. 나한테는 그럴 권리가 없다.
듣는 귀가 나 말고도 셋이 더 있었다. 나의 섣부르고 오만한 '나라면'을 그들의 귀에서 꺼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