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힘들었지'

이따금 옛생각

by 기나

어제 저녁에 갈치를 구우려다가 냉장고에서 '이게 뭐지'하고 꺼낸 게 지난 오일장에서 사온 꼬막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꼬막이 상했거나 꼬막을 씹지 않고 먹다가 얹혔거나한 증상인데 오슬오슬 한기까지 있는 게 몸살같기도 하고, 아 그러고보니 어제 당근에서 3만원 주고 책장을 가져왔는데 그거 집안에 들여서 집 한번 뒤집은 뒤끝인가 싶기도 했다. 갈증나서 낮부터 먹고 싶은 걸, 혹시 운전할 일이 생길까봐 참다가 좋지도 않은 컨디션에 맥주도 마셨다. 아프니 온갖게 다 아픈 이유가 됐다. 다행히 빌리의 돌봄과 간밤의 부대낌을 홀로 겪어냈더니 아침엔 가뿐해졌다.


지난주엔가, 내가 휴직한 뒤로 빌리가 다른 건 변하지 않았는데 점심시간즈음 전화가 뚝 끊겼다고 썼는데, 오늘 전화가 왔다. 응당 전달할 내용이 있거나, 확인할 내용이 있는가보다 생각하면서 받았는데 아픈 게 괜찮냐고 물어왔다. 맨 처음 바쁜 중에 보여준 관심과 걱정에 고마웠고, 바로 이어 가르친 보람을 느꼈다.


빌리에게 의도적으로 가르쳐서 반기계적으로 하는 언행들이 몇가지 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거나 실제로 아플때 '괜찮아?' 라고 묻는 것, 명절 등 시댁행사 이후 '고생했어'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가르친 나는 그러면 그런 말을 적절히 잘 하는가 하면, 그렇다. 나는 어쩌다 그런 걸 알고 할줄 아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면, 아무래도 경험인데 내 주변의 어떤 누구보다 말에 민감한 덕인 것 같다. 부모님이 학비 대어주신 학부 4년 다 마치고 학자금대출받아 두번째 학부로 편입해 살던 때였는데 만난 것도 아니고 만나지 않은 것도 않은 사람이 내가 과외 알바를 마칠 시간에 맞추어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왔다. 과외집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항상 그걸 확인하거나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힘들었지"


힘들었기 때문에 그 말이 좋았다. 긴장된 심장이 삽시간에 녹았다. '내 가족도 알려고 하지 않는 내 힘듦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네,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네, 이거 되게 좋은거네.' 모르긴 몰라도 그때 말의 힘을 경험했던 게 아닐까. 이 또한 경험인데 사람이 어떤 좋은 경험을 했더라도 그게 왜 좋았는지, 어떻게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도 하고, 감탄하는 능력이 다소 결여되어 평범한 말을 붙잡지 않고 그냥 흘러보내버리기도 하는 탓에 똑같은 경험에서 누구는 말의 힘을 발견하고, 누구는 콕 집어서 말해줄 때까지 모르고 살기도 한다. 네, 전자는 나고 후자는 내 남편이다. 빌리는 내가 아는 한 다정한 어머니한테서 하나도 배우지 못한 무심한 인간이다. 사람은 보면서 배운다는데 뭐가 잘못됐을까 따지면 많이 싸웠다. 잘못된 건 없는 것 같다. 그저 보고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하여, 나는 구체적인 에미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복잡한 일 딱 질색인 나와 길게 연결될 수 없었던 인물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따금 생각이 난다. 전문용어로 작업용 멘트가 아니었길, 지금도 어디선가 짝꿍의 노고와 어려움을 헤아리고 위로해주며 따뜻하게 살아가고 있길.

keyword
작가의 이전글쓸까 말까 와 잘까 말까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