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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해야 한다는 강박

nothing better

by 기나


동남아로 배낭여행을 떠나보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그린보트 예약 소식을 접하면서 가뿐히 사라졌다. 여차저차 어렵게, 그러나 생각보다 무난하게 그린보트를 예약했다. 1월 14일 자 휴직이고, 16일 출발일정이었다. 동남아에서 한 달 돌아다니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항지 투어 대금까지 지불하기 직전, 아빠의 수술일정이 그즈음으로 잡혔다. 날짜가 특정되지 않았지만 일주일정도 전 또는 여행기간 중에 수술받게 될 것 같았다. 몇 가지 서류를 준비해서 취소신청을 했다.


아이들에게 일주일 동안 크루즈여행을 다녀오자고 말해둔 터였기 때문에 아이들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 아빠는 한 달이 넘도록, 두 달 가까이 집으로 오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빠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에미이기도 하니까 아이들 방학을 조금 더 재미있고 스펙터클하게 보낼 기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날을 생각했다. 그러다 어떤 날은 늦잠 자고, 온종일 돌봄 센터에서 놀다 오고, 저녁에 자유롭게 게임하는 느슨한 일상이 방학의 맛이 아닌가, 우리 아이들 그만하면 방학다운 방학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게임만 할 수 있으면 만사오케이인 아이들이 달리 다른 방학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뭔가 특별하게 꾸며줘야 한다는 건 부모의 욕망처럼 보였다. 모아둔 돈도 없고, 아빠는 아직 병원에 누워 계시고, 엄마는 고단한 간호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데다가, 우리 집에는 5개월째 적응 중인 임보 멍 한 마리가 있다. 내 욕심처럼 어딘가로 떠나가볼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데 나는 왜 계속 원하고 있는가.


내가 시간이 많이 때문인 것 같다. 아이들 방학만이 핑계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시간 없어서 못 떠나던 여행을 왜 못 가고 있는지 한탄스러워서 그렇다. 여행이 곧 여유의 상징처럼 느껴지고, 방학이나 휴가기간의 과제와 같기 때문인 것 같다. 휴직/방학의 공식과 같은 패턴이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 걸 불행으로 만들지, 평화로 만들지가 내 마음에 달렸다는 게 요 며칠간 희망이었다. 특별한 건 다른 많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여행이라는 한 가지 답만 두었다.


매일매일의 과제를 가볍게 하고, 저녁엔 정해진 시간만큼 게임을 하고, 에미 애비와 자는 날을 정해두었기 때문에 저들끼리 자는 날은 시간이 되면 방에 들어가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눕는다. (학습만화다) 지동이는 소리 내어 읽고, 수형이는 지동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집중한다. 조용히 들여다보면 잠자기 전 의식처럼 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유난스럽고 시끄럽다고 여겼던 베르테르의 감탄을 따라 하고 싶을 만큼 우리 아이들의 하루하루에 탄성이 나온다. 하루는 형태도 없고, 무게도 없는데 마치 야무지고 적당히 무거운 차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학이라는 수조에, 하루하루라는 차돌들이 쌓인 형상. 베르테르여, 수식해 주오!


아이들이 개학을 앞두고 있다. 누구나 하는 것들을 하지 않았고,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닌 것들을 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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