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고. 오늘 <구토>를 읽고 만나기로 한 사람들과 만났다. 나는 다 읽지 못했다. 어쩌면 다 읽지 않은 걸지도. 그냥 무작정 읽어나 보기로 했는데 다른 읽기에 치여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모임에 가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리더가 아니니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서, 예의상이라도 '완독 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괜찮다기에 냅다 갔다.
세상에 어려운 책은 없다고. 익숙하지 않은 텍스트가 있을 뿐이라고. 내가 그 말을 어디서 주웠을까. <구토>를 읽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익숙해지는 거야 뭐, 경험치가 허락할 테니 읽다 보면 익숙해지리라. 이따금 저 책과 나는 지금 '만날 때'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정말 저 일기형태의 소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수시로 구토를 느끼는 걸 보며 대단히 신경을 거스르는 특정한 면면이 있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오늘 오가는 말들을 들어보니 존재니, 본질이니 하는 것이 전체적인 이해를 방해하기도 한 한편,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질이라는 것을 고민해 본 기억이 없다. 나 자신의, 인간의 본질 같은 것 말이다. 그냥 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존재는 그냥 만들어진 것, 우연한 것, 물리적 덩어리이며 본질은 그것의 이유가 아닌가 했다. 존재가 본질에 우선한다는 말은 인간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사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도 나왔다. 사물은 이유(본질)가 있어야 만들어(존재) 진다. 인간은, 신이 없는 세계에서, 까닭(본질) 없이 만들어(존재) 진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이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신이 있는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어서일까? 본질을 고민해 본 적이, 궁금해본 기억이 없다. 나 자신은 물론, 인간 전체에 대해서도. 어떤 분이 '본질을 찾아라'는 사르트르의 메시지를 불쾌해했다. (나는 다 읽지 않아서 사르트르가 어떤 대목에서 그렇게 말했는지 아직 모른다) 사르트르의 제안(?)이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이 나는 그분의 본질을 건드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본질을 고민하는지가 의문이다. 본질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대게 본질과 멀어졌을 때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게 아닌데' 싶을 때 우리는 '그럼 뭔데?'라는 질문을 이어하는 게 아닐까?
내가 고민해 본 본질은 '독서', '도서관', '사서' 뭐 이런 것들이다. 앞서 한 말에 따르면, '독서' '도서관' '사서'와 관련해서 '이게 아닌데' 싶을 때가 많기 때문이리라. 인간 존재의 본질엔 온 인류가 공감할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지만, '독서'라는 행위(존재)의 목적이나 이유, '도서관'이라는 시스템 혹은 장소(존재)의 목적이나 이유, '사서'라는 직업(존재)의 목적이나 이유는 있을 게 아닌가. 직업 현장에서 내가 항상 괴롭고, 그러면서 기쁜 건 본질에서 멀어져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본질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대체로 기쁘고 가끔 괴롭다는 걸 인식할 수 있을 때, 그보다 더 본질에 가까워질 수 없다고 여겨질 때 기쁘게 뒤돌아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와, <구토>를 읽다가, 존재가 본질을 이야기하다가, 결론이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