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님은 열두 살
작년에 새로 생긴 책방에 갔다가 책을 몇 권을 구입해 왔는데 작은 책방에서는 도서관 서가에서나, 대형서점에서는 발견되지 않거나, 손이 가지 않을 책들이 비교적 쉽게 보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은 책방 입장에서는 좋은 일인데 기본적으로 나 같은 독자가 그곳에 자주 가지 않는 게 비극(요즘 이 말 자꾸 써지네)이다. 보통 사기로 정해둔 책을 주문해서 찾으러 서점에 가서 그렇다. 둘러보는 맛을 즐기려면 작은 책방이지! 아무튼 그때 산 책중 하나가 <좀 더 사랑하는 쪽으로>였다.
책제목에 감탄했다. 대상이 언급되지 않았고, 나는 그 책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혀 없었는데 그저 제목만 보고 구입한 거라 기대가 만발이었다. 느낌상 저렇게 다정한 제목으로 포장한 사회과학_정확히는 사회학에 (330)에 분류될 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책을 두 쪽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관한 에세이였다. 육아에 관해서라면 궁금한 것이 없었다. 아이의 예쁜 짓, 미운짓, 끝도 없는 알만 한 이야기에 시간을 할애할 의지가 없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책이 불현듯 생각나는 날이다.
수형이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 아파트 내 돌봄 센터에서 놀다가 여섯 시쯤 되면 들어오는 아이가 4시쯤 들어왔는데 가방도, 옷도 없이 자전거만 끌고 왔다. 다시 갈 거냐고 묻자 아니라고 하는데 느낌이 묘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일 없다고 말했지만 한번 더 괜찮으니(뭐가?) 말해보라고 요청했더니 씻고 나와서 말을 하겠단다. 상황과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 같아서 그러라고 두었다. 센터에서 선생님이 붙잡는데도 뿌리치고 나왔다는 정보가 있어서 혼자 상상을 했다. 선생님께 혼이 났거나, 억울하거나 서운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어휴, 그러고 나와버리면 다시 얼굴 보기도 편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 씻오 나온 수형이가 해준 이야기는 다행히 선생님이 아니라 친구와의 갈등이었다. 이렇다 할 갈등도 아니고 친구의 태도가 짜증 나고 서운했을 것 같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센터에 가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앞으로 계속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한편, 열한 살의 수형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런 일에도 마음이 상하는 세심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구나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아침에 요구르트볼을 먹기로 했는데 위험하고, 어지러우니 주방에 온 수형이에게 거리를 두라고 무심결에 계속 밀어낸 일에 기분이 상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아이를 달랬던 일도 있었다.
세상에 그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다니. 내가 가진 민감함이 지금까지는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면 앞으로는 빛을 발하리라. 사춘기 아이가 있는 가정 별거 있을까. 일단 <조금 더 사랑하는 쪽으로>를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말도 안 되게 단순하면서 기가 막히게 세심한 감정의 드럼연주를 선보일 아이에게 조금 더 사랑하는 쪽으로 대해주기 위해서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