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잘못이 없어
-'아들'말고 '아이'를 위하여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 앞에 데려다줬다. 뒷좌석이 모두 내부 잠금되어 있어서 밖에서 열여 줘야 하는데 등교 교통봉사 하시는 선생님이 계셔서 부탁드렸다. 부탁드려 왔다. 둘 중 한 명이 앞자리에 앉으면 문제없는데 자꾸 그렇게 되었다. 오늘도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드렸는데 아이들이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가버렸다. 선생님이 '담부터는 문 닫아야 돼~' 하셨다. 어제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지동이를 향해 '크게 인사해야지' 하시는데 그 말씀하시는 마음 알 것 같았다. 우리 애가 미운 것이다.
나도 일을 하거나 아이들 친구들을 만날 때 보면 받은 것 없이 예쁜 애가 있고, 준 것 없이 미운 애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 뭐라고 못하겠다. 인사하라고 그렇게 말해도 지동이는 금방 잊는다. 인사가 몸에 익지도 않았나 보다. 수형이도 최근 몇 년 사이 엘베에서 만나는 주민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아이가 되었지, 어려서는 멀뚱멀뚱했기 때문에 인사하라고 말은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는 편이다. 다른 집은 보통 뒷좌석 잠금 풀려 있어서 아이들이 직접 문을 열고 나오는데 우리 집만 아직 잠그고 있어서 교통봉사 선생님이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기껏 열어줬더니 인사도 똑바로 안 하는 아이 밉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이 경우 '준 게 있어서' 밉다고 봐야겠군. 애가 미우니 애 에미도 곱게 보이지 않으리라.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번 열어달라니.
사실 이건 내 아이들이 '아들'인 것과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인데, 운전하고 돌아오는데, 아들 둘 키운다고 몹쓸 소리 들은 기억부터 덤벼들었다. 작은 아이를 낳고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데 그 어린이집 원장님이 빵점이네! 하셨던 기억부터. 무슨 소린가 했더니, 딸 둘이면 백점, 딸하나 아들 하나면 오십 점, 아들 둘이면 빵점? 게다가 딸이 큰 아이인지, 아들이 큰 아이인지에 따라서도 차등이 있었는데 그 점수까지는 모르겠다. 졸지에 내 생애 첫 빵점 평을 들었다. 기분 나쁜 줄도 모르고 흐지부지 넘어갔다. 두 번째는 시장에서 튀김을 사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아들 둘이냐고 딸을 더 낳으라고 간섭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때는 내가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걸 어느 정도 민감하게 이해하게 됐을 때라 '저 아주망 너 미집 가족계획을 자기가 세우고 같잖은 참견 한다'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쌀쌀맞게 뒤돌아 나왔다. 내내 부글거렸던 기억이 난다.
근데 내가 왜 오늘 아침 교통봉사 선생님 에피소드를 두고 '아들' 타령을 하는 걸까? 그분은 우리 '아들들'한테 뭐라고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한테 말씀하신 건데? 우리 아이들이 '아들'이라서 자동차 문도 똑바로 안 닫고, 인사도 제대로 안 한 게 아닌데?
어떻게든 오늘 일과 '아들'에 대한 잠재적 편견들을 엮고 싶었으나 실패다. 그냥 내가 우리 아이들을 '아이'가 아니라 '아들'로 극명하게 가르고 있어서다. 언젠가부터 아들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임을 인지한 아들 둘 에미는 내 아들들이 환영받는 인간으로 자라는 데 꽂혀있다. 우리 아이들 말고 '아들들'말이다. 오늘 일은 우리 '아들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을 남겼다. 인정하니 쓰리네. 그런데 이런 알아차림이 정말 소중하다.
우리 아들들을 조금 놔줘야겠다. 따뜻하고 유쾌한 인간으로 자라길 다시 소원하며, 선택받는 남자가 되라는 주문을 지우겠다. 넘들이 딸들은 훗날 에미 친구가 되어주네 어쩌네 하며 아들들은 그게 안된다고 아쉬운 소리 해대니까 우리 수형이는 에미 그런 말 들을 필요 없게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자는 약속을 수정해야겠다. 뭇 딸들처럼 에미 친구가 되어주지 말고 그냥 너대로 에미랑 사이좋게 지내자.
내일부터는 교통봉사 선생님 마음에 가시 돋지 않게 우리 아이들 하차는 내 손으로 직접 해야겠다. 그 가시 우리 아이들한테 향할 테니, 결국 에미의 유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