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일을 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수두룩하다. 여러 가지 답답함이 있겠는데 동료들과(특히 어르신..) 소통이 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 저쪽의 생각이 나에겐 뜬구름 같은 이야기 같을 때, 내쪽의 생각이 저쪽에 충분히 가닿지 않는 것 같을 때 느끼는 답답함은 너무 일상적이라 그냥 직장생활의 기본조건으로 여길 정도다. 그래서 사소한 연결도 엄청난 쾌감과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닐까.
그러면 내가 가장 무게 있게 느끼는 답답함은 무엇이냐.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도서관은 왜 책 읽기를 당위로 삼는가. (그러면서 책 읽기 주변을 겉도는 아이러니)
개인적으로나, 직업인의 입장에서 모두 책 읽기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고 매개다. 무엇을 위한 수단이고 매개인가? 좋은 삶을 위한 수단이고 매개다. 좋은 삶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끼는 삶, 충만한 삶, 내 마음에 드는 삶. 나는 좋은 삶을 추구하는 한 가지 방편으로 책을 읽는다. 책 읽기가 그 방편이 된다는 것을 온 시민들의 동의하고 함께 읽는 것이 목표다.
책은 훌륭하고, 멋진 것이라고 말하는 일은 내가 해본 일중 가장 공허하다. (대표적으로 책축제가 그렇다. 읽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하는 북토크도 그렇다. 도서관이 조금 더 정직하게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갈증이 크다. 도서관이 지금과 같다면 도서관이 무용해지고, 사서라는 직종이 사라지는 미래가 오면 왜 안되는가? 내 동료들 중에 모두가 납득할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 정말 그런 책을 직접 읽고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때 좋은 삶에 가까이 있는 기분을 느낀다. 내가 그리로 가고 있다는 안도감도 있다.
지난 2주간 조금씩 <정희진처럼 읽기>를 읽는 동안 내 세계가 저만큼 넓어졌다. 밑줄 친 문장들이 희미해지면서 세계는 다시 탄력적으로 줄어들지 모르겠다. 그런 건 걱정되지 않는다. 다른 책의 밑줄 친 문자들이 또 넓혀줄 것이고 그런 과정의 반복이 내 세계의 기본 면적을 넓혀놓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다. 어려운(익숙하지 않은) 텍스트들은 훌렁 넘기기도 했지만 밑줄이 한 40개쯤 그어진 것 같다. 물음표라서 그은 밑줄은 없다. 전부 짜릿한 해방감에 하이파이브하듯 친 밑줄이다. 아, 정말 하이파이브하고 싶은 사서가 되고 싶다. 그와 나 사이에 책이 있고, 그와 책 사이에 나라는 사서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며 읽는다.
문득 이런 의문도 든다. 내가 꼭 사서여야 할까? 공공도서관에서 나 같은 사서를 환영하지 않는데 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