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사람
우리는 이 책을 #휴식 #힐링 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골라내 읽기로 했다. 아무래도 '게으름'이라는 단어가 영향을 주었지 싶은데 펼쳐보니 게으르게 읽을 수 없는 책이라는 게 함정이다. 아, 나라는 독자가 있는 환경과 수준에서는 그렇다. 나는 잘 읽히지 않는 글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익숙해지도록 읽어 나간다. 그래서 이 책의 첫 글, 이른바 표제작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미처 익숙해지지 못한 상태에서 읽게 되었고, 두번째 글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을 비교적 게으르게 읽을 수 있었다.
내게 '게으름'은 늦게 일어난다거나, 할 일을 미루는 형태인데 휴식하는 기분, 힐링하는 기분과는 거리가 멀다. 게으름은 곧 과업이 '이따만큼' 남겨진 괴로움이고 짜증으로 이어진다. 다정하고 유쾌하게 다듬어갈 수도 있었던 성격에 가시가 달린다.
가시를 달고도 편안한 사람은 없거나 아주 드물 것이다. 스스로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나는 타고난 게으름을 방치하는 자신을 대체로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살아온 나를 되돌아보니 그렇게 말해도 될 것 같다.
나는 버틀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에서(수필이라고 한다) '근로가 미덕'이라는 관습적 믿음에 반기를 들고 있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그게 전부인 것 같지도 않다. 한번 더 읽고 다시 정리하기로 하고 오늘은 두번째 글인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을 발췌를 먼저 기록한다.
(38쪽) 르네상스 시대에는 배우는 것이 술을 마시거나 사랑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삶의 기쁨'의 하나였다. 이것은 문학뿐 아니라 보다 엄격한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지식은 힘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글을 열고 있는 러셀은 위의 문장에서처럼 '예술과 사색에 깃든 풍요와 자유의 회복에서 오는 정신적 기쁨'(39쪽)을 동기로 삼았던 르네상스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르네상스 이후 실용적 지식에 대한 가치가 높아지면서 '정신적 여유'가 없어져 오늘날에 이른 모습을 (좋게말하면) 안타까워한다.
(42쪽) 우리에겐 정신적 여유가 없다. 그게 뭐든 간에 우연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에 도움이 될 지식을 제외한 다른 어떤 지식도 습득할 여유가 없다
(43쪽) 앞선 시대들과 비교해 우리 세계의 특징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특징의 근원은 '유용한 지식'에 있다.
그러면서 '무용한 지식'의 이점으로 '숙고하는 습관 조성'을 드는데 따끔하다. 누구나에게 따끔하지는 않을 것이다. 업무 관련자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실무와 연결되지 않는다'며 모임의 질을 간단히 폄훼하고 시간이 아까울 때도 있다는 말을 해버린 전력이 있는 나라는 독자에게 특히 따끔했으리라. 모든 관계의 유기적 연결을 믿는 나는 '무용한 지식'을 따로 구분하고 있지 않다. 나름 목적의식을 갖고 참여하는 모임이라 목적 언저리에도 닿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기분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러셀은 그 부분도 지적한다.
(44쪽) 의식적인 활동이 어떤 한 가지 목적으로만 모아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쇠약 증세를 동반하는 균형감의 결여를 보이게 마련이다.
(48쪽) 행동보다 사고에서 기쁨을 찾아 내는 습관은 어리석음을 막아주고 과도하게 힘을 추종하는 현상을 방지해 주느 보호막이며 불행할 때 평온을, 근심에 싸였을 때 마음의 평화를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다
(52쪽)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위의 마지막 문장에 의하면, 자가진단을 하건대, 나는 지성인인가? 내가 나에 대해 갖는 '마음에 드는 구석'에 '지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니 갑자기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무용한 지식은 말 그대로 무용한 것이 아니라 무용해 보이는 자유의 품을 키우고, 지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느낌적인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