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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할 수 있는 것

싶다 금지

by 기나

하고 싶은 거 많은 소망부자.


내가 그런 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말 불현듯, 나는 바라는 건 많고 행동하는 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고 싶은 게 왜 그렇게 많아? 그냥 하면 될 것 같은 일도 맨날 하고 싶다 타령이구나 하고 있는데 하루는 사서동기가 정곡을 찔렀다. '언니는 하고 싶은 게 정말 많네요'


나도 지겨운 '싶다'를 내 인생에서 떼어버리지는 못하겠고, 최소화하자 싶어서 '하고 싶다'는 말습관도 의식적으로 줄여나가고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은 해보려고 해 왔다. 그렇게 되니 결혼 후 남편의 성향과 맞지 않아 나는 짜증을, 남편은 인내를 키워나갔는데 원래 짜증 많은 내가 짜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원래 인내하는 남편이 인내를 다지는 쪽으로, 뭔가 차이와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멀어져만 갈 수도 있었던 것 같다.


나만 그런가 모르겠지만 '하고 싶다'는 결국 소비와 연결되었던 것 같다. 예외도 있지만 대게 돈을 쓰는 일이고, 나는 돈을 벌면서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지금도 그렇다) 늘 욕망만 가진 가난한 사람이었다. 쓰고 보는 진실이 되어 버리는 문장이네. 조금 더 진실해져 볼까.


'하고 싶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할까?'라는 질문으로 계속 '하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적절한 호응을 기대하면서 그랬다. 어휴, 정말 나라는 인간을 두고 총체적 난국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남편은 호응이 어려운 사람이다. 내가 바라는 건 예스 OR 노우인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 정도도 나한테 못 맞추나 미웠다.


요즘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이라는 진은영 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있는데 거의 모든 글이 뜨겁지만 몇 군데서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차오르는 울음을 느껴야 했다.


어떻게 아내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힘은
긴장하고 있었노라고 어리석은 짓 하지 않고 꼬임에 속지 않고
더 강한 자와 어울리지 않기 위해서

헤르베르트라는 시인의 '생애'라는 시의 한 구절이라고 인용하며 시인은 시의 화자가 '평범함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우리가 그 상태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한순간도 교활하거나 타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순간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그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여 발언한다. '라고 설명했다. 남편의 애씀으로 연결되어 울었다. 헤아림 없는 나의 처신이 부끄럽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남편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아주 자주, '싶다'를 금지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을 한다. 끝도 없을 욕망, 욕구를 그때그때 충족해 보려는 욕심이 발끈하지 않게 살살 달랜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보자고.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내가 정말 좋다고 내가 말한 적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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