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 개인사
올해 제사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형이에게 말해줄까 했다. 그러나 지동이도 같이 듣고 있어서 입을 닫았는데 내가 왜 내 아이들에게 아직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까,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됐다.
양력으로 4월에 태어난 나는 그해 음력 4월에 나를 낳은 엄마를 잃는다. 전혀 모르다가 언젠가부터 매년 '엄마 제사'라고 불리는 제사를 지내는 걸 알아챘고 누구도 정면으로 말해주지 않았지만 진짜 엄마는 돌아가셨다는 걸 인지하고 살게 됐다. 그러나 비밀이었다. 그리워할 것도 없었지만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나중에 온 엄마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예감했던 것 같아 더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자랄수록 주변에서 자꾸 '없는 엄마'를 소환했다. 나는 모르고 있어야 하는데 응당 아는 것을 전제하고 무슨 말이든 하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 시절엔 알아서도 안되고 몰라서도 안 되는 것 같아서 나 스스로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산소에도 한 번 데려가지 않다가 셋째 언니의 유골함을 안고 처음으로 '엄마'한테 인사하자고 어두컴컴한 산소엘 데려갔다. 얼굴도 모르고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엄마'를 향해 엄마라고 부르며 언니를 잃은 회한까지 얹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로 비밀이 아니게 된 것 같다. 듣기도, 말하기도 전처럼 불편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나라면, 내가 내 부모였다면. 조목조목 다 말해주었을 것 같다. 이 제사에만 유독 절을 시키는 까닭, 얼굴도 모르지만 네가 기억해야 하는 사람인 이유. 엄마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이제와 생각이 든다. (언니들은 들었을까.) 같은 이유로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의 외가에 제사가 여러 번 있는데 그중 꼭 가야 하는 제사가 하나가 있다는 것. 지금 할머니 말고 엄마를 낳아준 할머니가 따로 있는데 엄마가 태어나고 한 달도 못 있어서 돌아가셨다는 것. 돌아가신 할머니 곁에 엄마의 언니, 너희들의 막냇이모도 같이 있다는 것. 영문도 모르고 잔뜩 불편한 기색으로 제사에 참여(?)하는 게 아쉽고 안쓰럽다. 수형이와 지동이에게 알 기회를 주고, 일말의 정성을 담은 태도를 가질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것이다.
아이들이 알면 할머니에게 무례하거나 상처가 될 질문들을 할까 봐 지레 겁먹고 있었다. 결국 엄마를 보호하려고 나도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냈던 걸까, 그것도 이제와 생각이 든다. 어우, 나는 25년을, 지각이 생기고부 터면 12,3년 정도를, 엄마 둘 가진 것이 마치 내 십자가인양 짊어지고 살았네. 사춘기 시기와 겹쳐, 어디에도 말하지 못해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외로웠던 시기였다. 내 부모의 무심이 가장 원망스러운 부분인 것 같다. 뭔가 억울해.
내년 제사 전엔 기회를 보고 말해주고 싶다. 기회는 많다. 명절에 산소에 갈 때 데려가서 얘기해 줄 수도 있고, 언니 기일, 언니 생일 등 언니를 보러 갈 때 한 번에 말해줄 수도 있다. 아이들, 특히 지동이는 또 물을 것이다. 엄마를 낳아준 할머니는 왜 돌아가셨어? 언제 돌아가셨어? 막냇이모는 왜 돌아가셨어? 언제 돌아가셨어?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아무것도 돌려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낳고 돌보다 보니 돌려 말하지 않고, 차갑게 말하지 않으면서 분명하게 말하는 기술이 생긴 것 같다. 아닌가. 타고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