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말뫼에서 마지막 밤을
작심하고 간 프랑스 파리는 실망스럽고,
불시착한 독일 칼스루에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여행이라는 게 그렇다. 기대를 품었던 장소가 아닌 의외의 공간에서 감동을 받곤 한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은 실망한 쪽에 가까웠다. 물론 스톡홀름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러나 어쩐지 나와는 맞지 않는 듯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데다 관광객은 너무나 많았다. 이전에 머물렀던 핀란드 헬싱키가 잔잔한 도시였기에 더욱 피로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스톡홀름에서 기차로 4시간을 내달려 도착한 남부 도시 말뫼는 의외로 마음에 쏙 들었다. 말뫼는 스톡홀름, 예테보리에 이어 스웨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그렇다곤 해도 북유럽 여행 전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다. 말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정말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이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도시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말뫼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평화롭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공원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공원 한 편에는 여자아이 한 명이 옷을 입지 않은 채로 분수에서 나오는 물을 맞으며 놀고 있었다. 즐겁게 노는 그 아이를 30분쯤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관광객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놓였다. 동쪽에서 10시간을 날아서 온 관광객이 할 말은 아니지만 실상이 그랬다. 시끌벅적한 도시보다는 조용한 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숙소는 스칸딕 호텔로 예약을 했다. 스칸딕은 하얏트, 힐튼 같은 호텔 체인 중 하나인데 이름(스칸디나비아에서 따온 듯 보인다)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북유럽에만 있다. 스칸딕은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깨끗하고 서비스가 좋다. 헬싱키에서 한번 이용한 이후로 마음에 쏙 들어서 스톡홀름에서도, 말뫼에서도 스칸딕에 묵었다. 같은 호텔 체인이라도 도시마다 가격은 다르다. 헬싱키와 말뫼에서는 1박에 10만원 안팎이었고 스톡홀름은 15만원정도였다.
딱히 관광지랄 것이 없는 도시였다. 20층짜리 스칸딕 호텔이 이 작고 조용한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속했다. 여행기를 쓰다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도시에는 ‘터닝 토르소’라는 건축물이 있었다. 비틀어진 모양의 아주 독특한 건물인데 여행하는 동안에는 그런 건물이 있는 줄도 몰랐다. 예전 같았으면 그 유명한 걸 못 보고 왔다며 아쉬워했을 테지만 요즘 들어선 생각이 달라졌다. 랜드마크에 발도장을 찍는 것이 여행의 목적은 아니다. 내가 말뫼에서 즐거웠다면 그걸로 된 거다.
말뫼의 매력은 의외성에 있었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듯 보이는 고요한 도시에 강렬한 색을 쓴 건축물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첫 번째 건물은 말뫼 현대미술관. 갈색 벽돌 집들 사이로 철골조로 만들어진 큐브 모양의 건물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철골조는 채도가 높은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이 미술관의 주황색 사랑은 외벽에만 그치지 않았다. 건물 내부 카페도 전부 주황색이었다. 바닥부터 기둥, 테이블, 의자, 선반까지 빼놓지 않았다. 무채색 공간에 주황색 페인트를 뿌려놓은 양 보였다.
한국이라면 건축물에는 결코 쓰지 않을법한 색이었다.
말뫼 현대미술관(Moderna Museet Malmö). 얌전한 도시에 놓인 주황색 건축물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이혜원
화장실과 물품보관함은 온통 노란색이었다. 은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선명한 색이었다. 보관함 문에는 번호와 함께 각기 다른 미술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2번은 알렉산더 칼더, 17번은 프랜시스 베이컨이고 48번에는 한국 비디오아트 작가인 백남준의 이름도 적혀있었다. 각각의 보관함 안쪽에는 작가가 생전에 남긴 말이 새겨져 있었다. 짐이 없어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재미있는 시도로 보였다. 그중에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꼭 그 자리에 내 짐을 맡겨놓고 싶을 터다. 사소하지만 물품보관함을 가지고도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구나 싶었다.
이 노란색은 공항으로도 이어졌다. 말뫼공항의 외벽도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깔맞춤’은 공항 내부로도 이어졌다. 공항에 있는 항공권 발매기와 안내판에 적힌 글씨 색깔도 같은 색이었다. 왜 이리도 노란색이 많을까 생각해보니 스웨덴 국기가 떠올랐다. 파란 배경에 노란 십자가가 가로로 누워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스웨덴 여행 중에 봤던 우체통도, 이케아 로고도, 지하철 기둥도 모두 노란색이었다. 스웨덴의 못 말리는 노란색 사랑이다.
말뫼 현대미술관 내 화장실과 물품보관함. ⓒ이혜원
말뫼공항 외벽, 말뫼공항 내부 항공권 발매기의 모습. ⓒ이혜원
말뫼는 마지막 행선지였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만감이 교차했다. 뜻밖의 실직, 뜻밖의 퇴직금, 뜻밖의 북유럽 여행. 일을 시작하면 당분간은 이런 여행이 힘들 테다. 결혼도 생각해야 할 나이다. 결혼하고 나면 이렇게 혼자 유럽여행을 떠나기 어려울 테다. 내 인생에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밤은 뜻깊게 보내고 싶었다.
레스토랑 대신 편의점에 가기로 했다. 주머니 사정은 충분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호텔에서 자전거를 빌려 편의점으로 갔다. 일상을 살고 있는 그들 틈에 끼어 크루아상 두 개와 레몬주스 한 병을 샀다. 자전거 핸들에 빵과 주스를 담은 비닐봉지를 끼우고 자전거를 탔다. 7월, 스웨덴의 밤 8시는 한낮처럼 밝았다. 백야 때문이다. 선글라스도 쓰지 않은 채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자전거를 탔다.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호텔로 돌아와 빵을 우물우물 먹고, 샤워를 하고 나왔다. 커튼을 열고 커다란 창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누군가를 향해 감사의 기도를 했다. 이렇게 행복한 여행의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이 마음을 간직하고 살겠습니다-라고.
그리곤 호텔 방에 놓여있는 메모지에 짧은 편지를 남겼다.
“사흘간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다시 또 만나기를 바랍니다.”
메모를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렇게 여행의 마지막 밤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