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동 고개 성우이용원
코끝이 빨개질정도로 추웠던 11월 1일. 취재를 위해 만리동 고개를 찾았다. 옛것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동네. 마을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떡볶이와 오뎅을 사먹었다.
목적지는 이발소, 성우이용원이다.
이남열 사장의 일과는 아침 6시 30분부터 시작이다. 집에서 ‘1분 30초’ 거리인 성우이용원으로 출근해 전날 쓴 수건 등을 빨고 개점 준비를 한다. 그렇게 1시간 반 동안 준비를 마치고 오전 8시부터 손님을 받는다. 점심시간은 따로 없다. 잠시 엉덩이 붙일 틈이 나면 그때가 ‘밥시간’이다. 그렇게 밤 9시까지 이발을 하고 10시가 돼야 문을 닫는다. 청소, 빨래, 이발 모두 혼자서 한다. 여느 자영업자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자기 생활이라는 게 없다.
성우이용원은 서울 공덕동 만리동 고개에 있다. 용산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고개를 올랐다. 버스에서 내리면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가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용원, 미용실, 슈퍼, 방앗간, 양곡 쌀 직매장 등 족히 30년은 돼 보이는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성우이용원은 그중에도 가장 고참이다. 1927년 이남열 사장의 외할아버지가 문을 열어 1935년 사위인 이 사장 아버지가 물려받았다. 이남열 사장이 가업을 이은 건 1960년대 초반이다. 56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년이면 성우이용원이 문을 연지도 90년이다. 한국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이용원이다. 서울시에서는 성우이용원을 ‘서울미래유산’ 중 한 곳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오래된 것만이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렇게 세밀하게 이발하는 기술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자신 뿐이라고 이남열 사장은 자부한다. 인터뷰를 하며 이발하는 것을 지켜보니 한 손님을 이발하는 데만 5가지 종류의 가위를 썼다. 전체적으로 머리숱을 칠 때, 옆머리와 윗머리를 정리할 때, 삐져나온 머리를 정리할 때마다 가위를 바꿨다. 이 사장은 “이렇게 세밀하게 이발을 해야 시간이 오래 지나도 머리가 뒤틀리지 않고 그 모양 그대로를 유지한다”고 했다.
성우이용원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한 물건들도 많다. 감자가루다. 이 사장은 머리를 자르는 중간중간 붓에 감자가루를 묻혀 머리에 발랐다. “이렇게 하면 잘못 잘린 부분이 눈에 띄어”
이남열 사장은 이용원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1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이발을 배웠다. 꿈 많은 10대 소년에게 이발은 그다지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다. 가업을 잇고 싶지 않아 방황도 많이 했다. “팔도강산을 떠돌며 도망다녔다”는 그다. 그래도 어느 시기가 되니 이발만 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성우이용원은 내부는 근현대사 박물관 같다.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하다. 35년 된 의자가 이 집에선 가장 신참이다. 방식도 옛것을 고수한다. 일반적인 상수시설이 없다. 연탄난로 위에 커다란 수조를 두고 물을 덥혀서 쓴다. 물건이나 인테리어를 새것으로 바꿔볼 생각은 하지 않았냐고 묻자 따끔한 일갈이 날아온다. “사람들이 이런다니까. 머리 깎는 기술이 중요하지, 시설이 뭐가 중요해”
머리 감길 때 손님들의 자세도 다르다. 요즘 헤어숍처럼 손님을 뉘어 놓지 않고 숙여서 감긴다. 샤워기는 이발용 물뿌리개로 대신한다. 샴푸 대신 비누를, 린스 대신 식초를 쓴다. 샴푸와 린스가 너무 독해서란다. 물뿌리개에 식초 몇 방울을 떨어트린 다음 머리를 헹구면 마무리다. 머리를 다 감기고 나면 손님 바지 주머니에 수건을 끼워준다. 알아서 닦으라는 표시다. 요즘 헤어숍에 비하면 불편한 것 투성이다.
그래도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두 시간 반 남짓 동안 줄줄이 네 명의 남성이 다녀갔다. 예상외로 동네 손님은 얼마 안 된다. 동네 손님은 하루에 열 명도 안 된다는 게 이 사장의 설명이다. 단골손님들은 불편을 자처하고 만리동 고개를 올라 성우이용원에 온다. 이 사장은 “여기서 머리를 딱 세 번만 잘라보면 모양이 잡힌다”고 자부했다.
이발비는 1만3000원. 70원이던 시절부터 시작해 이만큼이나 올랐다. 정가제이긴 한데 다들 이 돈 주고 머리를 깎는 건 아니다. 손님들이 계산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니 1만 5000원을 내는 손님도, 2만 원을 내는 손님도 있었다. 이발 장인에 대한 예우이자 감사 표시다. 대기업 회장이나 사장들이 오면 5만 원, 10만 원씩 내고 간다는 것이 이 사장 얘기다.
오래 하다 보니 별별 손님을 다 만난다. 이발소에서 갑질을 하려는 손님들도 많다. 평소에 받은 스트레스를 여기 와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엔 어쩔 줄 몰랐는데 이젠 보자마자 감이 와. ‘진상’의 감. 심지어 나보고 키 작다고 시비 거는 사람도 있다니까. 그런 사람들은 조용히 머리 깎아서 보내지. 머리 깎는 기술뿐 아니라 이런 것도 노하우 같아. 손님 성향에 맞게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노하우지”
이발과 미용의 경계가 희미해진 요즘 태세에는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기본과 원칙이 있는데 그걸 안 지켜. 남자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여자는 미장원에서 잘라야 하는데 요즘은 구분이 없어졌어. 남자들도 미장원 가잖아. 완전히 다른데 말야. 이발소는 머리를 깎으며 사람들 마음을 깎고 이미지를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야. 이발사는 자기 자신을 이겨야만 남의 머리도 깎을 수 있어. 쉬운 일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