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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Nov 25. 2016

손큰 아버지, 손맛 자랑 아들

“음식은 신뢰” 59년째 ‘감자국’ 고집…돈암동 태조감자국 이호광사장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일찍 가게를 찾았다. 손님 입장에서 음식을 먹어보고 취재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서울 성북구 돈암제일시장 인근에서 59년째 ‘감자국’을 팔고 있는 태조감자국이다. 흔히들 감자탕이라고 부르는데 이 집에선 예전부터 줄곧 감자국이라는 이름을 썼단다. 벽에 붙어있는 주인장의 설명에 따르면 예부터 국물이 많은 음식에는 ‘국’자를, 국물이 적은 음식에는 ‘탕’를 붙였다고 한다.


먹어보니 확실히 이 요리는 탕이 아닌 ‘국’이었다. 1인분을 시키니 돌솥용기가 아니라 휴대용가스버너에 냄비가 나왔다. 넉넉한 육수에는 돼지등뼈, 깻잎, 감자, 수제비, 떡, 당면이 듬뿍 담겼다. 아삭아삭한 깍두기와 생양파, 청양고추도 테이블을 수놓는다. 가격은 1인분에 7000원. 2인분부터는 맛깔난 한국어로 음식의 양을 표현했다. ‘좋-타’가 1만2000원, ‘최고다’가 1만5000원, ‘무진장’이 2만원, ‘혹시나’가 2만5000원이다.



고슬고슬한 밥이 나왔다. 깍두기, 양파, 청양고추도.


보글보글. 1인분인데 양이 정말 많다. 저녁까지 배가 불렀다.


독특한 메뉴이름. 이중에도 '혹시나'가 특히 재밌다.


태조감자국 이호광 사장.


감자국 양념은 어머니, 깍두기는 아들 전담


태조감자국 창업자의 손자인 이호광(44) 사장은 깍두기 전담이다. 매일 오전 10시에 가게 문을 열어 새벽 5시까지 일하니 힘들 법도 한데 깍두기만은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 ‘손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SBS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 깍두기 달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똑같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도 희한하게 맛이 달라요. 직원에게 맡겨본 적도 있었는데 깍두기 특유의 시원한 맛이 안 나고 텁텁하더라고요. 그래서 깍두기 버무리기는 무리해서라도 제가 해요. 이런 작은 차이들로 손님이 단번에 끊기진 않지만 조금씩 결과로 나타납니다”


맛에 대해선 유독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이 사장은 남들에게 자신의 가게를 소개할 때도 ‘최고’니 ‘맛집’이니 하는 말은 안 한다고 했다.


“음식은 100%가 없어요. 아무리 잘해도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기에 자신 있게 맛있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가끔씩 손님이 계산할 때 ‘음식이 입에 맞으셨느냐’고 물어보곤 하죠. 수십 년째 비슷한 요리법을 유지해오고 있지만 계속 신경은 써요. 계절에 따라 숙성 시간이 다르니 그런 점도 주의해야 하고요”


정겨운 풍경. 소주 한잔 하기 좋은 곳이다.


종로에서 온 할아버지. 인터뷰 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자기도 찍어 달라 신다. 사진 찍어드리고 얼떨결에 술도 따라드림.


인터뷰를 지켜보던 단골손님들은 “우리 모습도 기사에 실어달라”며 사진 촬영을 요청해 왔다.



“서두르지 마라…장사는 20~30년 앞을 보고 하는 것”


태조감자국은 1958년 1월24일 충남 진천 출신의 故이두환씨가 서울 돈암동에 개업했다. 13년 후엔 아들 故이규회씨와 부인 박이순(69)씨가 가게를 물려받았다. 이씨 부부의 차남인 이호광 사장은 서울 돈암동에서 나고 자라서 20년째 일하고 있다. 완전히 세대교체가 이뤄진 건 아니다. 아직도 감자국 양념은 박이순씨가 직접 만든다.


“어릴 때부터 가게에서 감자까기 정도는 했지만 물려받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20대엔 잠시 사업을 하기도 했는데, 1997년 어머니 다리가 불편해지시면서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죠. 나중에 막상 빠지려고 하니 가게가 얼마나 힘든지가 빤히 보이더라고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태조감자국엔 아버지 이규회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했던 선친은 벽에 종이를 붙여놓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글을 적곤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써 내려간 일상의 시(詩)이자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하다.


특히 “장사는 자연과 예술에 맞추어서…장사란 목숨 걸고 해야 성공한다고”, “장사라는 것은 2~3년 내다보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20~30년 이상 앞을 보고 해야 되므로 급히 서두르지 마라. 해와 달은 날마다 뜨고 지느니라”는 대목은 선친의 장사 철학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는 손이 커서 베푸는 걸 좋아하셨어요. ‘좋은 재료를 써서 요리하고, 이윤은 많이 남기지 말자’ 주의였죠. 식사하고 그냥 나가는 손님이 있어도 정말 돈이 없다고 하면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하고 돌려보내셨고 외상손님에 대해서도 인색하지 않으셨어요. 돈 받으려고 악착같이 굴다 보면 결국 돈도 못 받고 사람도 잃는다는 거예요”


불경기에 더 잘된다…“좋은 식재료, 정직하게 파는 것”


개업 당시 상호는 부암집이었다. 감자탕이 인기를 끌며 너도나도 상호 앞에 ‘원조’를 붙이자 이 사장의 아버지가 “그럼 우리는 최초라는 의미에서 ‘태조’라고 하자”고 해서 태조감자국이 됐다. <사진=이호광씨 제공>



태조감자국엔 아직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점심시간을 지나 비교적 한산할 시간이었는데도 가게엔 빈자리가 없었다. 절반은 감자국에 소주 한잔을 곁들이는 중년들이고, 절반은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온 청년들이었다. 이 동네 주민도 있고, 입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줄을 서서 먹어야 할 정도다.



돈을 꽤 벌었을 것도 같은데 그렇지는 않단다. 태조감자국은 창업 당시부터 아직까지 셋방살이다. 지금 사업장 맞은편에 가게가 하나 더 있었지만 건물주가 바뀌며 10년 전에 가게를 뺐다. 당시엔 1~3층을 모두 쓸 정도로 규모가 컸지만 많이 줄었다. 매출도 감소했지만 “지금이 더 알차 졌다”는 것이 이 사장 얘기다. 이 사장의 어머니와 동생, 직원 7명이 번갈아가며 일을 하고 있다. 위 사진은 본래 쓰던 가게를 빼기 직전 아쉬운 마음에 찍은 사진이다. 아버지가 직접 적은 글귀들이 가득한데, 종이를 붙인 뒤에 쓴 터라 잘 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달픈 마음에 "벽을 떼 오고 싶었다"고도 했다. 현재의 가게에 적힌 글귀들은 대부분 이씨의 동생이 옮겨 적은 것이다.


아직까지 장사가 안 돼 고민해본 적은 없다. IMF 외환위기 등 불경기 때 태조감자국은 오히려 성업했다. 이 사장은 “그 점만은 복”이라며 겸손을 내비친다. 오래 장사해 온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묻자 정도(正度)를 제시한다.


“음식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요. 서민들 주머니 사정에 맞는 음식을 좋은 식재료로 만들어서 파는 것. 큰 욕심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해온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신여대입구 역 앞 돈암제일시장. 사람 냄새나는 곳이었다.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글쓰기. 일을 하며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취재 기사를 보강한 글입니다.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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