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에도 해가 쨍쨍, 백야 현상
벌써 5년 전 얘기다. 복학을 앞두고 2월 한 달간 유럽여행을 다녀오면 되겠지 싶었다. “2월에 유럽을 간다고? 글쎄….” 주변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날씨가 춥고, 해가 빨리 져 여행을 하기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정말로 그랬다. 너무 추운 날엔 하루 종일 숙소에서 잠을 자도 했고, 독한 감기를 앓아 한인민박 아주머니의 간호를 받은 일도 있었다. 오직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비수기라 줄을 서지 않고도 관광지에 입장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7월 북유럽 여행은 달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일단 여행 가방이 단출해졌다. 내복도, 두꺼운 코트도 필요 없었다.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얇은 원피스 몇 벌을 챙겼다. 챙긴 옷을 다 합쳐도 두꺼운 겨울옷 한 벌 부피도 안 됐다. 여름옷은 저렴하니 가서 더 사면되겠지 싶어 일부러 조금만 챙기기도 했다.
예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값 싼 의류매장에 옷을 여러 벌 사 여행 중에 입을 옷은 차고도 넘쳤다. 다만 생각보다 7월의 북유럽은 쌀쌀했다. 특히 아침엔 꽤 날씨가 추워 기온이 영상 10도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한낮에는 민소매를 입은 사람이, 아침에는 패딩점퍼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해괴한 날씨였다.
무엇보다 여름 유럽여행의 묘미는 해가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한국도 여름에는 해가 길고 겨울엔 짧다. 여름에 8시는 돼야 어둑해진다. 그러나 북유럽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핀란드,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지역은 말 그대로 북극에 가까운 지역이라 여름엔 해가 길고 겨울엔 정말 짧다.
여름에는 오전 4시경에 해가 떠서 밤 11시는 돼야 진다.
핀란드에 도착한 첫날 밤, 9시에도 해가 쨍쨍한 것을 보며 감탄했다. 북극에 가까울수록 이 현상은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여름에는 해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백야(白夜)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 그대로 하얀 밤이라는 의미다. 밤 11시쯤 해가 지고 난 다음에도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희미하게 해가 자취를 감췄다가 오전 4시 경이되면 다시 떠오른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건 해가 길어 오랫동안 거리를 쏘다닐 수 있다는 거였다. 여자 혼자 하는 여행에서 안전은 첫 번째 요소다. 북유럽은 치안이 좋다고들 하지만 방심은 금물. 해가 진 뒤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9시가 돼도 환하니 시계를 보지 않으면 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낮보다 뜨거운 북유럽의 밤. 핀란드 헬싱키의 모습이다. ⓒ이혜원
시내 잔디밭과 호숫가에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 틈에 끼어 낮보다 뜨거운 북유럽의 밤을 즐겼더랬다. 아침 일찍 나온 날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다 오후 2시경 숙소로 돌아와 낮잠을 자고 다시 나가기도 했다. 체력 보충, 휴대폰 충전, 사진 정리. 2시간 정도 꿀잠을 자고 오후의 두 번째 여정을 시작했다.
겨울엔 정반대다.
핀란드 헬싱키를 기준으로 보자면 해가 떠있는 시간이 6시간이 채 안 된다. 아침 9시경 떠서 오후 3시가 넘으면 진다. 전 세계의 일출, 일몰 시각을 보여주는 사이트인 타임앤데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동지인 12월 22일 헬싱키의 일출은 9시 24분, 일몰은 오후 3시 13분이었다. 여행자들에겐 최악의 여건이다. 다만 오로라를 보고 싶다면 늦가을에서 초봄 사이에 북유럽을 찾아야 한다는 전언이다. 오로라 자체는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여름에는 해가 거의 지지 않기 때문에 오로라를 관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핀란드와 스웨덴에선 6월 하지(夏至) 축제가 국경일로 지정돼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일 년 중 가장해가 긴 날을 축하하며 축제를 벌인다. 하지가 지나고 나면 길고 혹독한 겨울이 온다. 그래서일까, 7월에 만난 핀란드와 스웨덴 사람들은 짧은 여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뜨거운 밤을 한껏 즐기려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