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토요일
1. 일주일 이상 금주 중이다. 지난주에 청하 매화수 맥주 마시고 술병 나서 주말 내내 고생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김치냉장고엔 살얼음이 언 맥주가 있지만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금주가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2. 다양한 종류의 할 일이 생겼다. 주말에 해야 할 일. 회사 일도 있고 개인적인 일도 있고. 다 쓰는 일이다. 평소에 쓰는 일을 하니 쉬는 날엔 쓰고 싶지 않다. 근데 되게 모순적인 게 난 지금 쓰고 있다는 거야. 여튼 쓰고 싶지 않은 이유는, 뇌가 쉴 수 없어서다. 반복적인 업무는 아무리 복잡한 일이라도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머리를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다. 몸이 기억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할 수 있다.
몇 년 전 '습관의 힘'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 소개된 사례에 따르면 한 남성이 사고를 당해 뇌를 다쳤다. 새로운 것을 5분 이상 기억할 수 없게 됐다. 그래도 집에서 먼 곳에 그를 데려다 놓으면 용케 잘 찾아왔다. 수십 년간 다닌 길이니까, 뇌를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몸이 기억하는 방향대로 움직이는 거였다.
뇌를 쓰는 일은 피곤하다. 쉴 수가 없다. 집중한만큼, 노력한 만큼 결과물로 나온다. 내 이름을 걸고 나가는 글을 엉망으로 쓸 수는 없다. 지금 힘들다고 대충 휘갈겨서 던져놓으면 다시는 보기 싫은 그런 글이 된다. 영영 남는다.
3. 한의원에서 일하던 시절에 한약재로 된 물약 비슷한 걸 만들었었다. 한약을 달이는 건 아니고, 약재가 함유된 액체에 유칼립투스액, 프로폴리스 같은 걸 스포이드로 몇 방울 떨어트리는 정도의 간단한 일이었다. 용액을 몇 방울 떨어트리면 기분 좋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는데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깔때기에 거름망을 끼우고 잔여물들을 걸러낸 다음 용기에 물약을 나눠 담았다. 몇 병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드는 것. 가끔은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육체를 움직이는 건 신성한 일이야.
4. 글 쓰는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대들도 날 좋아하지 않겠지만) 내가 하는 일이라 너무 잘 알아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공감대를 형성하긴 좋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애정이 샘솟지는 않는다. 나와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사람,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끌린다.
5. 우리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할 자신이 없어" 예문은 이런 거다. "나는 결혼해서 아이에게 희생할 자신이 없어" 나도 그런 말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거다. 우리는 에둘러 부정의 의사를 표현할 때 "자신이 없다"는 말 뒤에 숨는다. 결혼해서 아이에게 희생할 각오로 시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시기는 영영 오지 않는다.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거다. 잘하고 못하고는 그다음 문제.
6.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아악 출근해야 하는데! 아 맞다, 오늘 토요일이지. 뜨끈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극세사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겨 다시 잠을 청했다. 이런 게 행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