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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Apr 16. 2017

20년 넘게 한 집에 살다보면

나의 서울이주기

1. 1995년 이곳에 터를 잡았으니 무려 22년이나 살았다. 난 이게 그리 특별한 일이라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요 몇년사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라는걸 깨닫고 있다. 한 집에서 20년 넘게 살았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생각해보면 동네 친구들도 다들 근처긴 해도 이사를 갔다. 조금 더 좋은 아파트로, 새로 지은 아파트로. 우리집만 유일하게 여전히 이 터를 지키고 있다. 넷이 시작해 오빠가 결혼을 해 셋이 남았고, 이제는 나도 이 집을 떠나려하고 있다.



2. 지금의 집에 정착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이주를 많이 한 편이었다. 나의 태생은 대구다. 그래서 지금도 사회에서 대구 사람을 만나면 고향사람이라며 반가워한다. 대구에서 6년쯤 살고, 부산에서 1년을 지내다 서울로 올라왔다. 엄밀히 말하면 서울이 아니라 광명이지만, 그땐 그냥 '서울간다'고 했다.


서울로 이사가던 날이 아직도 생각난다. 나는 경상도에서 언어를 배웠으니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엄마, 서울애들은 어떻게 말을해?"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경상도 사람인) 엄마는 내게 팁을 줬다. "서울에선 말 끝을 올리면 돼. 안녕하세요↗↗"하는 거지. 경상도에선 "안녕하세요↗오↘" 하잖아. 설명을 듣고도 감이 잘 안왔다. 그래서 그냥 난 "안녕하세요?"하고 말 끝에 물음표를 붙여서 말을 했었다. 유년시절의 기억이 몇 안 되는데, 서울로 이사하던 날도 그 중 하나다. 인생에서 꽤 강렬한 경험이었나보다. 어릴땐 사투리를 안쓰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만, 지금은 내가 하는 경상도 사투리가 아주 어색하다.



3. 서울에 오자마자 아빠는 나와 오빨 서울대에 데려갔다. 사실 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아빠가 여러 번 얘기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정도다.  왜 우릴 데리고 갔는고 하니, 우리가 나중에 커서 대학에 들어갈 때 "서울대 가는 길을 몰라서 못갔다"는 말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딱하게도 오빠와 나 모두 서울대에 못 갔다. 물론 이런 이유로 서울대에 데려갔다는 건 아빠의 농담이었을 거다. 나는 크면서 아빠한테 공부하란 얘길 한번도 들어본 적 없다. 우리 아빤 인생에서 공부보다 중요한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서울에 왔으니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는 곳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거겠지.


4. 한동네에 20년 이상 살다 보면 인간관계의 폭도 좁아진다. 내 가까운 친구들은 초중고 동창이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자연스럽게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고, 시험을 쳐서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우리는 서로의 모든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나쁜 게 있다면 구남친들도 이동네 사람이 많다는 거다. 운동 끝나고 땀에 절어 수건을 두르고 걷고 있는데 횡단보도에서 마주친다거나, 버스에 한자리가 비어있어 잽싸게 앉아있었더니 옆자리에 구남친이 앉아있다든가(소리없이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갔다), 새남친과 다정하게 걸어가는데 구남친의 절친과 마주친다거나.. 뭐 여튼 그렇다.

작년에 테니스 레슨을 받았던 코트. 주변 테니스코트들은 하나둘씩 주차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아침 레슨 때 새의 지저귐소리가 참 좋았는데.


5. 도시가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광명은 전형적인 베드타운이었는데 최근 몇년사이 코스트코니, 이케아니 하는 글로벌 유통업체들이 들어서며 '뜨는' 동네가 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는 인구들도 있고, 요즘엔 외국인들도 종종 보인다. 그렇다고 내 삶이 달라진 건 크게 없는 것 같다.


6. 오래된 아파트라 불편한 점도 많다. 매년 8월이 되면 열흘에서 2주정도 온수가 안 나온다. 더울 시즌이라 대개는 괜찮지만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할 때나 여름치고 쌀쌀한 날엔 고역이다. 비명을 지르며 샤워를 한다. 근데 되게 바보같은게 왜 매년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지조차 모른다. 아마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 물탱크를 청소한다거나, 수도관을 교체한다거나.. 뭐 그런 이유가 있을 것도 같은데 안일하게 왜인지 알아보지조차 않고 그냥 불편해하며 20년째 이러고 살고 있다.


겨울엔 또 어찌나 동파가 잘 되는지 모른다. 복도식인데다 산 밑에 있어서 굉장히 춥다. 한겨울에 방심했다간 수도가 터진다. 아침에 갑자기 그런 일이 터지면 급히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머리를 감고 출근 준비를 한다. 아빠는 멀티탭 여러 개를 연결해 드라이기로 언 수도관을 녹인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혀서는. 아이고, 뭐 이런 일이 다 있댜, 하면서도 그냥 그러고 산다. 불편해하면서.


7. 불편해도 재개발 같은건 안했음 좋겠다. 초등학교 때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탈출' 놀이를 했던 놀이터, 중학교 때 공부한답시고 동네 공부방에 가서 수다만 떨었던 그 벤치, (인생에서 가장 잘 먹던 시절인) 고등학교 때 야자 끝나고 친구 셋이서 비비큐 치킨을 허겁지겁 먹었던 그 야외테이블. 그 모든 풍경들이 다 정겹고 그립다. 언젠가 내가 이 동네를 떠날 것이기에 갖는 이기심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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