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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Jun 17. 2017

어느 평범한 토요일


1. 정기검진 때문에 병원엘 갔다. 생각지 못했던 걸 발견했고, 큰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걱정이 되기보단 성가신 느낌이다. 아, 또야. 하는.. 걱정이 되진 않아도 기분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다.


2. 오랜만에 본가에 갔다. 차로 가득한 곳에서 지내다 본가에 돌아가면 시골 온 느낌이다. 같은 동네인데도 여긴 바로 옆에 산이 있어서 공기도 좋고 나무도 많다. 우리 집 바로 뒷길은 2차선 도로가 나무로 뒤덮여 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다. 예전에 꽃보다 할배에서 파리에 간 신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죽어갈 때 이 풍경이 잔상으로 남아있을 것 같아"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죽기 전에 아마도 이 풍경이 떠오를 것 같다고. 나의 유년기, 소년기, 성년기를 보낸 이 곳의 풍경이 생각날 것 같다. 20년 넘게 나를 지켜봐 왔을 이 곳의 나무들이. 아름답고 아련하다.



3.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책들로 가득 찬 도서관을 걸어 다니는 건 즐거운 일이다. 찾을 책이 몇 가지 있었는데 맘에 드는 것이 없어 결국 한 권밖에 못 빌렸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다. 7월 초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이 나온다. 예전 소설들을 읽으며 대기 타는 중. 요즘 읽은 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다. 하루키 소설 중 가장 좋아한다고 꼽을 수 있는 작품. <상실의 시대>는 한번 읽고 나니 또 읽고 싶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두 번째 읽어도 좋았다. 아니, 처음보다 더 좋았다. 이 책에 대해선 다시 제대로 쓸 기회가 있겠지.


4. 오늘 본가 방문의 목적은 자전거다. 장 보러 가는데 걸어가긴 멀고 버스 타긴 가까운 애매한 거리를 자전거로 다니면 좋을 것 같아서 자전거를 가지러 갔다. 자전거를 마지막으로 탄지 1년도 넘은 것 같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고 쇠는 녹이 슬어있고,.. 물티슈로 적당히 세차를 했더니 그럭저럭 탈만하다. 자전거포에 가서 바구니를 사서 달고, 바퀴에 바람을 넣고, 때탄 흰 손잡이는 검은색으로 교체했다. 23,000원을 들이니 꽤 쓸만한 자전거가 됐다. 간만에 자전거를 타니 정말 기분이 좋다. 자전거는 마약 같은 힘이 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데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면 정말 날아갈 것 같아. 인생 이 정도면 참 살만해, 라는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그런데 오늘은 그 긍정 파워가 그리 길지 않았다. 땡볕에서 1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돌아오는데 정말 죽을뻔했다.



5. 집이 엉망이다. 정확히 말하면 밤이가 온 뒤로 집이 엉망이 됐다.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히스테리컬하게 청소를 하곤 했는데, 이 녀석이 온 뒤론 청결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고양이는 모래에다 용변을 보는데,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발에 묻은 모래들이 온 집 안에 굴러다닌다. 동그란 모래알은 빗자루로 쓸어 담아도 잘 담기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세게 쳤다간 부서져버려 집을 더 더럽힌다. 게다가 어젠 밤이가 밤새도록 토하고 설사를 했다. 무심한 집사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이 난장판이다. 바닥 여러 군데 토를 하고, 변을 보고, 설사도 하고(내 이불에도ㅠㅠ) 깨서 보니 애가 기운이 없다. 몸에 토사물과 모래가 뒤엉켜 있는데도 그걸 처치조차 못하고 있었다. 집이 더러워진 것보다 밤새도록 고생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여 너무 속상했다. 새벽 5시에 씻기 싫다고 발악하는 아이를 씻기며 휴-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이불과 이불 사이에 잠들어 있는 녀석을 보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내 마음도 참 오락가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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