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6 언젠가 사라질 정겨운 공간에 대한 기록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 내가 일하게 될 곳은 은마상가 안에 있다고 했다. 살면서 대치동이란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은마아파트는 대치동에서 오래된, 잘 사는 동네라는 얘기를 언뜻 들은 기억만 있었다. 지레 겁을 좀 먹었다. 삐까뻔쩍한 동네에서 일을 하려면 그곳 분위기에 좀 맞춰야 하려나.
대치역 3번 출구로 나오자 말로만 듣던 은마상가가 보였다. 내가 지레짐작했던 부촌의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좋게 말하면 정겹고, 나쁘게 말하자면 낡았다. 상가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상가는 A동과 B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상가 수만 500개 가까이 된단다. 웬만한 쇼핑몰 부럽지 않다.
1층에는 옷가게, 문방구, 커피숍, 치킨집, 토스트집, 약국 등이 있고 2층에는 병원, 은행, 전당포, 3층에는 학원이 있다. 살면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이 이 상가 안에 있다고 보면 된다.
2015년 10월 은마상가의 기록. ⓒ이혜원
지하는 먹거리 천지다.
반찬가게, 전집, 칼국수집, 짜장면집, 돈까스집, 분식집, 떡집, 빵집, 생선가게, 야채가게 등이 가득하다. 지하에 있는 전통시장이라고 보면 된다. 시식 인심도 후하다. 꽤 많은 상점에서 맛보기용 음식을 늘어놓고 손님들의 코와 혀를 자극한다. ‘하나만 먹어봐야지’ 했다가 정말 맛있어 얼결에 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은마상가에서 1년 남짓 일하는 동안 많은 가게에서 밥을 먹었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도 웬만하면 맛이 있다. 거기 일하시는 분 말로는 오래 되기도 했고, 가게들이 많다 보니 맛있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다. 지금껏 남아있는 곳은 맛이 검증된 가게들이라는 얘기다. 은마아파트가 지어진 게 1979년이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가게들도 상당하다.
은마상가의 정겨운 느낌이 좋아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굳이 들러 밥을 먹는다. 지하에 있는 만나분식은 이 동네에서 꽤 오래된 분식집이다. 먹어 보면 특별할 건 없다. 초등학교 때 학교 앞에 있던 분식집 맛이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쥐포도 이 집에 가면 먹을 수 있다. 달짝지근한 떡볶이와 바삭한 쥐포를 먹고 나면 마지막 코스는 뻥튀기 아이스크림이다. 뻥튀기 안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담아서 햄버거처럼 만들어주는 건데, 이게 아주 별미다. 고춧가루 범벅이 된 입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느낌이다. 친구와 둘이 배불리 먹고 5500원을 냈다.
은마아파트는 2002년부터 재건축을 추진 중이다. 아파트 세대 수도 많고, 상가 수도 많아 재건축 진행이 쉽지만은 않다고 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될 테다. 은마상가에 투자하려 눈독을 들이는 이들이 많다 한다. 아파트를 깨끗하게 새로 짓는데 상가만 허름한 채로 두는 것도 어색한 일일 터다.
은마상가가 헐리고 나면 어떤 모습일까.
거기에서 일하던 사람들, 그 풍경, 그 공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똑같은 장소에 비슷한 가게를 짓는다 애초의 그것과는 다르다. 은마상가는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아파트 문화와 상가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현대 유적이다. 인간이 살아온 발자취가 담겨 있으면 그것도 엄연히 유적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 우리는 오래된 것들은 변화의 대상으로 보는 걸까. 전통의 재해석이니, 현대화니 하는 미명을 붙여가면서. 낡고 오래된 것이 사라져간다. 돈 있는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씁쓸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