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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Feb 07. 2018

나는 페미니스트다

1. 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했다.

사실 예전에는 ‘나는 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니지만…’ 하고 서두에 언급하며 방어적인 자세로 얘기하곤 했어요.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따라오는 공격과 비아냥거림이 두려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성별에 따라 기회나 역할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동등한 삶을 지향하는데, 그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뭐지?’ 하고 반성하게 됐어요.

내가 딱 느끼고 있었던 그 지점이다. 페미니스트가 '성별에 따른 기회나 역할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면, 나는 분명히 페미니스트가 맞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말은 금기어 비슷한 게 돼 버렸다. '꼴페미'니 '메갈'이니 하는 말들과 함께 남성들의 역차별을 조장하는 안하무인인 여성들을 뜻하는 단어로 치부됐다.


돌이켜 보면 20대 초반의 나는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에 갇혀있었다. 나는 독립심 강하고 남녀가 동등하다고 주장하면서, 개념 있는 여성이라는 얘길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어릴 때는 남자들을 만나면 괜히 돈을 더 많이 쓰고, "너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 정말 개념 있구나"라는 얘길 들으며 뿌듯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더 사랑받기 위한 발악 같은 거였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억지로 그렇게 했다.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개념녀 프레임에 갇혀있었던 거다.



2. 반년쯤 전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그동안 내가 겪은 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었음에 울컥했다. 여자로 살며 성폭력(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단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런 말을 하면 일부 남성들은 "여자들이 너무 예민한 거야",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사람 많은 지하철에선 어쩔 수 없는데 변태 취급을 한다", "꽃뱀도 많잖아"라고 한다. 사람을 병신 취급해도 유분수다. 일부러 만지는 것과 실수로 손이 닿는 것쯤은 구분할 줄 안다. 웃어넘길 수 있는 발언들을 모두 봐준다 치더라도 심각한 성희롱 발언을 많이 듣고 산다. 나는 정말 조심한다고 노력하며 살아왔건만, 지금 돌이켜보면 위험한 순간들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할 때도 있다.



3. 검찰 내 성추행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가 쓴 글 전문을 읽어봤다. 소설 형식으로 그날 사건과 지금까지 겪은 일을 적은 내용이었는데, 너무 생생하게 다가왔다. 특히 사건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는 말에 무척 공감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이게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아 머릿속이 멍해진다. 상당 시간이 흘러 그 순간을 떠올려보면 그게 진짜 일어났던 일인지 나의 상상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상태가 된다. 내 몸이 기억하는 더러운 감촉만이 그것이 상상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임을 알려준다.


자신이 당한 성추행을 온 국민에 공개하는 내부고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떠올리기 싫은 그 순간을 계속해서 복기해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성추행 폭로 후 2차 가해가 벌어질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외모 평가, 몸매 평가, 평소의 행실, 출신지역 등을 바탕으로 온갖 평가와 추측들이 난무할 것임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설사 성추행을 당한 누군가가 남성들에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했다 하더라도,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즐겨 입었다 하더라도 그게 범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이런 일들이 버젓이 벌어진다.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서지현 검사가 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나올 것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설사 그런다 할지라도 그가 겪은 일이 사실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자.



4. 내부고발을 고려해본 적이 있다. 그래서 더더욱 서 검사의 상황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첫 번째 현실적인 고민은 업계에서 매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더 큰 문제는 함께 일해온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라는 고민이다. 대외적으로 폭로하고 나면 그 조직은 일정 기간 풍비박산이 난다. 대외적인 이미지 추락은 물론이고 매출 감소나 조직개편 등으로 실제 회사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짧게는 며칠이 될 수도 있지만, 길게는 몇 개월이 될 수도 있다. 내부고발자는 정의로운 인간으로서 조직을 홀가분하게 떠나버리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그럴 처지가 아닌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그들 역시 한때 나와 한솥밥을 먹으며 지냈던 동료들이다.


 

5. 조직 내 성폭력은 단순히 남녀 문제로 봐선 안 된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행하는 권력형 범죄다. 실제로 여성 상사가 남성 부하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는 것도 봤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조직 내에서 남성의 비율이 훨씬 높으며(30대 그룹만 봐도 남녀 성비가 8:2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절대다수가 남성이니 이 범죄의 가해자로 남성이 두드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6. 성희롱을 하는 이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면, 직장 동료인 여성의 얼굴이나 몸매를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칭찬이라고 오해한다는 거다.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 아니다. 적당히 웃으면서 반응해줄지 모르지만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회식자리가 특히 위험하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너 정말 괜찮다. 내가 결혼 안 했으면 잘해보려고 했을 거다" 따위의 말을 칭찬이랍시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실제로 내가 본 남자 상사들은 그런 말을 했다. "아 요즘엔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그래, 그게 맞다. 못할 말은 안 하면 된다. 그 말 안 한다고 병나는 것 아니지 않나. 그런데 그 말 듣는 당사자들은 매우 고통스럽고 수치심을 느낀다. 성희롱이 권력에 의한 문제라고 확신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남성들이 사장님 와이프나 딸한테도 그딴 소릴 할 수 있을까? 절대로 못한다. 칭찬이랍시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랫사람이니, 반박하지 못할 거니까 그런 말을 한다는 얘기다. 그런 점이 정말 비겁하다.


(나를 포함한) 여성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 불쾌한 상황에 처하면 즉시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세요. 어색하게 웃고 있으면 좋아하는 줄 압니다. 참다 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폭로하면 '무슨 저의가 있어 이제 와서 그러냐'는 말을 듣고요. 회사생활은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의 분명한 의사표시로 잠깐 불편한 상황이 될 수는 있겠지만, 생각보다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일로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을 정도의 회사라면 오래 다닐만한 곳이 아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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