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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Feb 28. 2018

나의 리틀 오피스텔에서 빚은 요리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퇴근하는 날이 있다. 10시간 이상 회사에 있다 보면 소모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날 집에 오면 밥을 짓는다. 우리 집에 백미는 없고, 찹쌀과 잡곡 두 종류다. 현미, 조, 수수, 보리로 밥을 지으면 오독오독 씹히는 맛이 좋다. 잡곡밥이 쌀밥보다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보통 맛있는 음식은 몸에 좋지 않거나 칼로리가 높은 법인데(튀김처럼) 잡곡밥은 내가 애정하면서도 몸에도 좋은,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다.


모든 요리를 감으로 한다. 계량컵도 없고, 레시피도 참고는 하는데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는 편. 밥 지을 때 가장 중요한 물 조절도 그렇다. 밥솥에 찹쌀과 잡곡을 담아 씻은 다음 물 조절을 시작한다. 손등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까지 물이 담기게 한다. 내가 느끼는 것보다 물을 조금 더 버리면 내 입맛에 꼭 맞는 꼬들밥이 된다. 남들이 먹기엔 너무 딱딱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딱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물 양이 좀 적지 않나'하고 고민되는 지점까지 버려야 한다는 것. '이 정도면 괜찮겠지' 정도에서 밥을 짓고 보면 항상 내 기준에선 좀 진 밥이 된다.


청양고추 넣어 칼칼한 된장찌개, 스팸구이, 배추전, 열무김치. 집밥.


메뉴는 그때그때 다르다. 오늘 요리는 된장찌개, 스팸구이, 배추전이었다. 된장찌개는 굉장히 오랜만의 도전이다. 자취를 시작하고선 처음이다. 엄마가 청양고추가 들어간 만능 된장을 공수해줘 그걸로 끓였다. 끓는 물에 된장, 다진마늘(많이), 고춧가루, 양파, 파, 버섯, 청양고추를 넣고 팔팔 끓였다. 그런데 메인이라 할만한 녀석이 없어서 아쉽다. 두부도 없고. 냉동실을 뒤져보니 설날에 엄마가 준 장조림용 고기가 있다. 이 녀석을 넣어주니 아주 훌륭한 메인이 됐다. 씹는 맛도 있고, 고소하다.


재료를 손질하고 손에 물도 묻히고 불 앞에서 음식 냄새를 맡다 보면 어느샌가 내게도 활기가 돈다. 분명 진이 빠진 것 같았는데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던 에너지가 샘솟는다. 글쎄, 뭐랄까. 대부분 회사원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도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서 일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느낌이 공허할 때가 있다. 분명 무언가 생기기는 하는데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단말기를 거쳐야만 접속할 수 있는 세계다. 요리는 그런 공허함을 채우는데 꽤 도움이 된다.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혀끝으로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먹어내는 일. 인생의 큰 기쁨 중 하나다.


그런 나이기에 '리틀 포레스트'는 보석 같은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직접 재배한 식재료로 정성스러운 한 끼를 만들어 먹는 영화. 여름엔 콩국수를, 겨울엔 수제비에 배추전을 해 먹으며 계절을 만끽하는 영화. 보고 나니 간절히 요리를 하고 싶어 졌다. 어릴 때 자주 먹던 배추전은 이 영화를 본 뒤 엄마를 초빙해서 비법을 전수받았다. 리틀 포레스트는 보고 또 보고싶은 영화다. 주인공인 김태리의 극 중 이름이 내 이름과 같은 것조차 너무 행복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했던 음식을
리틀 오피스텔에서 만들어 봤다.


<봄>

파스타

파스타는 혼자 살기 전부터 가장 많이 해먹은 음식이다. 라면보다 만들기 쉽고 맛도 있다. 파스타는 소스 종류에 따라 토마토/크림/오일 등 크게 세 종류로 나눠볼 수 있는데 가장 어려운 게 오일이다. 걸쭉한 소스에 의존할 수 없으니 요리사의 역량에 따라 맛 차이가 많이 난다. 토마토는 보통 소스를 사서 붓는 경우 게 대부분이고,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건 크림이다. 요리용 휘핑크림에 우유, 소금, 후추, 파마산 치즈를 넣고 휘휘 저으면 완성이다. 먹다 보면 느끼하니 청양고추도 썰어 넣는다. 영화 속 혜원이는 봄을 맞아 올리브 파스타에 꽃잎을 얹어 먹었다. 봄이 오면 나도 해보고 싶은데.


<여름>

콩국수

콩국수도 내가 사랑하는 요리 중 하나다. 소면에 콩국물을 붓고 오이를 송송송송 썰어 넣으면 끝이다. 깨소금을 뿌리면 2배 맛있어 보이는 효과. 우리 엄만 콩국수 위에 방울토마토 반쪽을 올려주곤 했다. 하얀 도화지에 빨간 물감을 칠한 듯 색도 예쁘고, 별미이기도 하다.


<가을>

떡볶이

떡볶이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말랑말랑한 떡에 야들야들한 어묵, 파/양파/양배추를 곁들이면 환상이다. 떡볶이에 올리브유를 살짝 넣었더니 떡에 찰기가 생겨 더 쫄깃해졌다. 설날에 떡국 끓이고 남은 떡으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영화에선 은숙이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엄청 매운 떡볶이를 만든다. 그래서 나도 청양고추 팍팍 넣고 매운 떡볶이를 만들어먹었다.


<겨울>

배추전

배추전은 경상도에서 주로 먹는 음식이다. 어릴 때 엄마가 간식으로 많이 해줬는데 다른 지역에선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배추에 부침가루만 묻히면 뚝딱 완성되는 초간단 요리인데, 맛은 기가 막힌다. 담백하면서도 바삭하고, 배추는 아주 시원한 맛을 낸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이는 한겨울에 빨갛게 끓인 수제비와 함께 배추전을 먹었다.


김치전

비 오는 날 생각나는 김치전. 전 중에선 보기 드문 빨간 전이다. 오래돼 처치곤란인 배추김치를 잘게 썰어서 만들면 딱이다. 아삭아삭한 김치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밀가루가 만나 환상이다. 영화에선 직접 담근 막걸리와 함께 김치전을 먹었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막걸리에 도전해봐야지.


수제비

추운 날, 비 오는 날 생각나는 수제비. 쫄깃한 밀가루의 식감에 진한 국물까지 더해지면 환상이다. 감자도 송송 썰어 넣고, 양파와 파도 넣는다. 모든 한국음식이 그렇듯 여기도 다진 마늘을 넣어 국물을 내면 맛있다. 배추김치와 곁들여 먹었다. 다음엔 영화 속 혜원이처럼 빨간 수제비를 끓여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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