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밤이는 나를 졸졸 쫓아다닌다. 냐옹냐옹 하면서 자기를 봐줄 때까지 따라다닌다. 세수를 하고 있으면 번쩍 점프를 해서 세면대 옆에서 세수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오늘은 호기심이 과했는지 세면대 안에까지 들어와서 밤이 머리에 폼클렌징이 묻어버렸다. 밤이의 따라다님은 내가 멈추고 자신을 쓰다듬어줘야만 끝이 난다. 늘 그랬듯 침대에 누우면 밤이는 냐옹하며 내 가슴팍에 자리를 잡고 엎드린다. 그리곤 편안할 때 내는 골골송을 부르며 자신을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고양이의 몸은 만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으로 나뉜다. 1년차 집사인 나는 어설픈 손길로 고양이의 볼, 미간, 머리 위, 턱, 볼, 꼬리가 시작되는 부분을 쓰다듬는다. 밤이는 귀 안쪽을 만져주는 것도 좋아한다. 종잇장처럼 얇은 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면 편안한지 눈을 감고 음미한다. 방심하는 틈을 타 앞발 젤리를 만지면 손을 살짝 깨물어 경고를 보낸다. 만지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만지는게 시원치않다 싶으면 자기 뺨을 내 뺨에 대며 이렇게 좀 하라고 가이드를 준다.
밤이와 가까이서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빈도는 잦지만 러닝타임은 짧다. 고양이는 금세 싫증을 내고 곁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도 규칙이 있는데, 내 턱을 엄마 젖 빨듯 쭙쭙하고 빨다가 살짝 깨물더니 휙 하고 자리를 떠버린다. 그리곤 자기가 휴식을 취하는 자리로 가서 앉는다. 고양이는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휴식하는 장소는 반드시 집사가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어야 한다. 정말로 꿀잠을 자고싶을 때는 자신만의 아지트로 가서 등을 돌리고 자지만, 대부분의 경우 쉬면서도 항상 나를 지켜본다. 마음이 내키면 또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지금 이 글을 여기까지 쓰는 동안에도 두 번이나 와서 아양을 피우더니 갔다.
고양이는 예민하고 솔직하며 눈치가 빠른 동물이다. 싫은 것을 참아가며 좋은 척 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양이가 눈을 감고 골골송을 불러주면 그게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기쁘다. 나를 편안한 존재로 느끼고 있고, 지금 기분이 좋다는 의미다. 나에게 몸을 맡기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은 생명체를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아무렴 어때, 뭐가 중요해. 회사가 중요해, 일이 중요해, 돈이 중요해.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지. 이런 느낌이다.
고양이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참 오묘하다. 인간보다 생애주기가 짧은 생명체를 빨리감기로 보는 일이다. 밤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젖을 갓 뗀 아기였지만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 지금은 성묘(사람으로 치면 성인)가 되었다. 아기 시절의 밤이는 사료도 제대로 씹지 못해 고양이 우유에 불려서 줘야 했고, 밥을 먹을 때마다 새끼고양이 특유의 ‘냠냠냠냠’ 소리를 냈다. 아기고양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 빼앗아먹을까봐 내는 소리다. 인간과 살아보는 게 처음이었던 아기고양이는, 내가 자기 밥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땐 안 쓰는 나무접시에 고양이모래를 채워놓고, 화장실 쓰는 법도 가르쳤다. 밥을 먹인 뒤 곧장 화장실로 데려가서 촉촉한 수건으로 항문 주변을 톡톡톡톡 쳐주는 거다. 여기서 응아하세요-라고. 고양이 화장실에서 처음 대변을 본게 어찌나 기특했던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모래를 퍼올려 예쁘게 묻어놓기까지 했다. 그 후로 한번도 다른 곳에 실수한 적이 없다. 어린시절의 밤이는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우다다를 하며 날아다니고 내 손과 발을 물어뜯었다. 화도 내보고, 고양이가 싫어한다는 레몬을 이불에 뿌리기도 해보고, 물리지 않으려 양말을 신고 고무장갑을 낀 채 잠을 자기도 했다. 내가 몸을 조금이라도 낮췄다 하면 등이나 어깨에 올라탔고, 내 귀를 앙증맞게 물어뜯기도 했다. 이갈이 시기에는 갑자기 입을 우물우물하더니 훅하고 이빨을 뱉어냈다. 너무 신기하고 소중해 서랍에 예쁘게 보관해놓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밤이는 장난꾸러기지만 예전에 비하면 호기심이 줄었다. 이제 케이블을 봐도 물어뜯지도 않고, 두루말이 휴지를 볼 때마다 죄다 풀어놓지 않고, 내가 없는 사이에 혼자 선풍기를 켜거나 샤워기를 틀어서 나를 경악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이제 사람과의 삶에 익숙해져 자신이 아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점점 더 궁금한 게 적어질테고, 움직임도 둔해질 거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운이 좋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만큼 살다 세상을 떠날 거다. 큰 이변이 없다면 나는 밤이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될 것이고. 예전에는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펑펑 났는데 이제는 그때만큼 슬프지는 않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그렁그렁하지만) 인간의 삶을 빨리감기 해놓은게 고양이의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 생명체의 시작과 끝을 담담하게 지켜보는 존재가 되자고 늘 다짐한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니 괴로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라고. 언젠가 닥칠 그날을 위해 벌써부터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건만 막상 그때가 된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고양이를 돌보는 건 소중한 일이다. 보살핌 받는 누군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내 존재 의미를 찾기도 한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을 잃게 될 존재가 있다. 그것은 책임감이기도 하고, 부담감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감정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만 해볼뿐이다.